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하느님의 자비와 우리의 자비의 하나됨을 위하여(루카 6, 27-38) - 2484

Author
신부님
Date
2022-03-13 08:32
Views
1292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2484

2022년 3월 14일 월요일

하느님의 자비와 우리의 자비의 하나됨을 위하여(루카 6, 27-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사순도 벌써 2주에 접어듭니다. 재의 수요일을 엊그제 지내면서 다짐했던 것들을 되돌아 봅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대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지나간 시간을 탓하지 않고자 합니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단지 오늘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공부한 만큼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한다. 아니 그 이상 겸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도록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과 동떨어진 앎을 참된 앎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동떨어진 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 하지만 참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3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코린 전 8, 1-3)

사랑이 결여된 자신 만을 위한 지식은 남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단지 알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은 호기심이고, 알려지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은 허영심이고, 지식을 제 것으로 삼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은 더러운 욕망이다. 덕으로 나아가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은 현명 함이고, 남의 덕을 세우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합니다. 남의 덕을 세워 주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토마스 성인의 말씀은 바로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것과 일맥 상통함을 알게 됩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양의 개념이 아닌 질의 개념입니다.  에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 6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2, 6-8)고 잘 알려 주십니다.

누구나 다하는 사랑은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를 죽여야 하는 사랑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남겨두고 여분의 것 만을 나누는 것으로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습니다.

순교성인들, 마더데레사나  다미안 신부님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 놓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이러한 살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또 이를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 아닌 아가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들을 성장하게 합니다. 닫혀진 마음을 열리게 만듭니다. 내가 아닌 상대방이 우선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죽이고 상대방을 살리는 것이기에 상대방을 감동시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랑,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 19-20) 하고 말합니다.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로께서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박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의 삶은  내가 사는 하루가 아닌 그리스도가 사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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