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죄를 지을 기회를 죽이는 삶(마르 9, 41-50) - 2469

Author
신부님
Date
2022-02-23 00:48
Views
1059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2469

2022년 2월 24일 목요일

죄를 지을 기회를 죽이는 삶(마르 9, 41-50)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 42)

정치의 계절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과 떨어져 있기에 정치의 본류에서는 떨어져 있기에 삼자적인 입장에서 조금은 객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혼돈의 와중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진영의 논리에 빠져서 그 진영에서 제공하는 주장과 설명을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혼돈의 바다에서도 옳음을 볼 수 있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작금의 우리사회는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려운 혼돈의 사회입니다. 개인의 이익과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 모든 결정의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당연한 말같이 들려오지만 사실은 극도의 이기심의 표현입니다. 가진 자가 더 많이 갖기 위한 합리화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유혹에 대면해서 단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유혹은 너무나 교묘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선을 가장한 악의 논리에, 일반화를 가장한 악의 논리에  쉽게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댐이 아주 조그마한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것과 같이 사소한 죄의 용납이 더 큰 죄를 용인하게 되고 이러한 용인이 우리의 죄의식을 무디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당신을 믿고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사형시키는 형벌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사용하던 사형 방법 중의 하나였는데 유대인들은 이 형벌은 주검을 땅에 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 형보다 이 형벌을 더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의 벌의 엄중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은 큰 죄이고 이 죄에 대한 벌도 무섭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눈과 그리고 우리의 눈이 죄를 짓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예로서 우리의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한다면 잘라버려야  하고 눈이 죄를 짓게 한다면  그것을 빼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같은 내용을 표현만 바꾸어서 43, 45, 47절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은 이 가르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괄호에 44, 46의 번호만 나오고 성경의 구절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구절들은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8절의 말의 반복입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나를 거역하던 자들의 주검을 보리라. 정녕 그들의 구더기들은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한 채 모든 사람들에게 역겨움이 되리라.”는  이 구절은 이사야서 66장 24절에서 가져 온 표현인데, 악인들이 받을 영원한 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주요 필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성경의 본문으로는 인정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번호로만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리스어로 ‘게헨나'를 말하는데 , 이 말은 원래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벤 힌놈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기원전 622년 유다 왕 요시아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곳에서 '몰렉'이 라는 이름의 신에게 어린이들을 제물로 불살라 바쳤는데, 요시아 왕이 그런 짓을 못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우상 신에게 제물로 바친 일 때문에 그곳은 '저주받은 골짜기'가 되었고, 나중에는 종말에 죄인들이 갈 곳(지옥)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는데  '지옥 불'에 대한 표현도 거기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불과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불은 불순물을 태우고, 소금은 썪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49)는  말씀은  '종말에 앞서 모두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인 사랑을 소금으로 비유한다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어 버리는 것이 바로 소금이 짠 맛을 잃어 버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죄의 유혹을 이겨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죄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죄를 안 짓겠다는 소극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죄를 지을 기회를 없애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소금의 짠맛을 간직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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