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마태 11,16-19)- 1486

Author
kchung6767
Date
2018-12-13 04:06
Views
1009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486

2018년 12월 14일 금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마태 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 16-17))

오늘은 십자가의 성요한 사제 기념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오는 축하를 드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해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좀 더 넓게 보면,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해에, 국가 간의 이해에 서로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안정과 평화는 한 여름 밤의 꿈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서 상식적인 생각과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극도의 이기심이 지배하는 사회를  우리가 보아도 답답한데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모습일까 반문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서 회개를 하여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굳어서 일반 민중들과는 달리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도 받지 않고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인 하느님의 뜻을 물리칩니다. 이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하시는 말씀은 이들에 대한 극도의 안타까움의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으로 예수님의 이러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완고한 고집을 신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옳음을 옳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정해 놓은 그러한 사고의 틀을 부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나는 이러한 고집을 나의 소신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러한 사람들, 즉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배척하고 비웃는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 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 32)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들은 장텨에서 이 놀이를 할까 저 놀이를 할까, 하며 서로 다투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피를 불고 춤을 추는 것을 결혼식을 흉내내는 놀이이고 곡을 하고 우는 것을 장례식을 흉내내고 있는 놀이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금욕주의자인 요한에게는 춤을 추라고 요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께는 곡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청개구리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희브리서 12장 2절의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 쪽에 앉으셨습니다.” 하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의 원천이시고 이유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뜻과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으신다는 그 기쁨으로 세상이 주는 가장 모욕적인 형벌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수치로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당하는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실천하기 위해서 살다가 내가 당하는 수치는 수치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이 믿음은 세상적인 기준을 넘어서게 합니다. 오로지 하느님 만을 보고 살아가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수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사랑 만은 영원히 남아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만이 모든 은사의 존재의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모든 답은 그곳에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부터 상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옳음을 보고 옳다고 할 수 있고 그름을 보고 그르다고 할 수 있는 용기’있는 하루를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동시에 다시한번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Total 2,654
Number Title Author Date Votes Views
2654
New 희망의 시작 - 건강한 사회란(마르 9, 41-50) - 3216
신부님 | 06:11 | Votes 0 | Views 4
신부님 06:11 0 4
2653
New 희망의 시작 - 폐쇄적인 사고와 안목의 극복 (마르 9, 38-40) - 3215
신부님 | 2024.05.20 | Votes 2 | Views 134
신부님 2024.05.20 2 134
2652
New 희망의 시작 -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는 삶(마르 9, 30-37) - 3214
신부님 | 2024.05.19 | Votes 5 | Views 297
신부님 2024.05.19 5 297
2651
New 희망의 시작 - 성모님의 영적인 모성에 대해서 (요한 19,25-34) - 3213
신부님 | 2024.05.18 | Votes 5 | Views 433
신부님 2024.05.18 5 433
2650
희망의 시작- 주님의 뜻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삶(요한. 21, 20-25) - 3212
신부님 | 2024.05.16 | Votes 3 | Views 422
신부님 2024.05.16 3 422
2649
희망의 시작 - 세 번의 사랑확인에 담겨진 예수님의 배려(요한 21, 15-19) - 3211
신부님 | 2024.05.14 | Votes 4 | Views 471
신부님 2024.05.14 4 471
2648
희망의 시작 - 우리를 위한 고별기도(요한 17, 20 - 26) - 3210
신부님 | 2024.05.13 | Votes 6 | Views 534
신부님 2024.05.13 6 534
2647
희망의 시작 -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삶(요한 17, 11-19) - 3209
신부님 | 2024.05.12 | Votes 5 | Views 564
신부님 2024.05.12 5 564
2646
희망의 시작 -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요한 15, 9-17) - 3208
신부님 | 2024.05.12 | Votes 4 | Views 510
신부님 2024.05.12 4 510
2645
희망의 시작 - 믿음의 출발은 자신으로부터(요한 16, 20-33) - 3207
신부님 | 2024.05.11 | Votes 3 | Views 566
신부님 2024.05.11 3 566

Enquire now

Give us a call or fill in the form below and we will contact you. We endeavor to answer all inquiries within 24 hours on business 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