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론

희망의 시작 - 연중 제 7주간 -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루카 6, 27-38)

Author
kchung6767
Date
2019-02-23 05:27
Views
1275

연중 제7주간 미사

2019년 2월 24일 일요일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루카 6, 27-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쓰러진 이후로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셨던 천상적인 삶에서 하느님의 손길에서 벗어난 지상적인 삶으로 옮아 오게 됩니다. 한계적인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이 되겠다고 발버둥친 결과는 우리 인간이 감내하기가 힘든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대적하는 일입니다. 좋음이 나쁨으로, 선함이 악함으로, 무한이 유한으로 바뀌는 존재론적인 변화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위주의 사랑의 실천에 익숙했던 저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충격적이고 놀랍습니다. 수도 없이 이 말씀을 읽었지만 오늘처럼 비수같이 저의 마음에 꽂히기는 처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할 때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처럼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사랑은 양의 개념이 아닌 질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사랑해야 하는가 하고 질문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기준은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요한복음 3, 16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까지 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에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필립피서에서 “ 6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2, 6-8)고 잘 알려 주십니다. 

누구나 다하는 사랑은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를 죽여야 하는 사랑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남겨두고 여분의 것만을 나누는 것으로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습니다. 

순교성인들이,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다미안 신부님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기꺼이  내어 놓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이러한 살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또 이를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 아닌 아가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이 결여된 자신 만을 위한 지식은 남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단지 알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은 호기심이고, 알려지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은 허영심이고, 지식을 제 것으로 삼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은 더러운 욕망이다. 덕으로 나아가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은 현명함이고, 남의 덕을 세우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합니다.

남의 덕을 세워주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토마스 성인의 말씀은 바로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것과 일맥 상통함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사람들을 성장하게 합니다. 닫혀진 마음을 열리게 만듭니다. 내가 아닌 상대방이 우선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죽이고 상대방을 살리는 것이기에 상대방을 감동시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랑,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 19-20) 하고 말합니다.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로께서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박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그러한 자비를 실천하는 하루, 내가 사는 하루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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