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849
2016년 12월 6일 화요일
사회적인 약자를 배려한 마음(마태 18, 12-14)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 14)
오늘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특히 어린아이들이나 사회적인 약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웁니다. 세상은 사회적인 영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을 구별하여 차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한사람 한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세상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사랑의 법칙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어린이와 같은 작은 이를 당신의 이름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작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 10)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회적인 약자이거나 능력이없는 사람들을 말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의 연장선 상에서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두고서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 마리 때문에 아흔 아홉 마리가 희생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백 마리의 양들 가운데서 잃어버린 한 마리는 어쩌면 저 양들 사이에서는 작은 자일 수 있습니다. 그룹에서 이탈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자라는 양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흔 아홉마리는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양일 것이고 잃어버린 양은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없는 모든 면에서 모자라는 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바로 사회적인 약자는 양들 사이에서도 존재할 수 있고 이러한 약자에 대한 배려를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겸손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약자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약자 안에 존재하는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 사랑은 바로 함께 함입니다. 우리와 같은 작은 자를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렇게도 느껴지지 않았던 하느님의 사랑이 이제는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 41, 17절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약자, 즉 나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코린 전 1, 27)하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졌던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자신의 잘난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당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짐을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코린전 15, 9) 하고 자신을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 자신을 말합니다. 더나아가 자신을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에페 3, 8)로 말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자신을 죄인들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티모 전 1, 15)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모태신앙’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으로 진지하게 살아 왔나에 비례할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깨닫게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체험하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끼는 것입니니다.
하느님께서는 온세상을 다 사랑하시지만 나를 개별적으로 인격적으로 사랑하신다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바로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었는데 당신께서 다시 데려오신 양임을 깨닫습니다. 이 깊은 하느님의 사랑의 깨달음이 세상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을 없이해 주는 것 같습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사무 상 17, 45)”는 다윗의 말처럼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한 우리는 이제는 골리앗과 같은 저 악의 세상에서 굴복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