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신학 거장 칼 바르트와 의화론
큉의 박사학위 논문 「의화론」은 스위스 출신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K.Barth, 1886~1968)의 의화론과 트리엔트공의회에 나타난 가톨릭의 의화론을 비교한 것이다. 큉은 이 논문에서 두 의화론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며, 차이는 교회 분열을 일으킬 만큼 큰 것이 아님을 밝혀냈다. 가톨릭과 개신교 벽이 아직 매우 높았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상황을 고려할 때, 종교개혁 시발점이 됐던 의화론에서 양편의 의견 일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 큉의 논문은 신학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게 된다.
칼 바르트는 큉의 논문에 "만일 당신이 당신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라고 전개한 의화론이 실제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라면, 나는 나의 의화론과 당신의 의화론이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한편 칼 라너(K.Rahner,
1904~1984) 신부는 큉의 의화론이 가톨릭의 통상적인 신학에서 벗어나는 면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론 가톨릭 의화론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큉은 칼 바르트가 타계할 때까지 그와 신학적, 인간적 교류를 지속했다. 큉 스스로 바르트에게 받은 신학적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바르트의 용어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소위 무한한 차이'라고 표현되는 하느님께 대한 엄청난 경외심 △'항상 더 크신 하느님'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 △인간은 이 계시 사건을 '오직 신앙을 통해서 적합하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교회론 연구
한스 큉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스위스 루체른으로 돌아와 한 성당에서 1년 반(1957~1959) 보좌신부를 지낸 뒤 본격적으로 학문 활동을 시작한다. 독일 뮌스터대 가톨릭 신학부에서 교의신학 조교로 있다가 1960년 독일 튀빙겐대 가톨릭 신학부 교수로 초빙받아 부임했다. 1964년에는 동 대학 부설로 새로 설립된 교회일치신학연구소 소장 직책을 겸임했다. 큉은 같은 대학의 개신교 신학부 교수들, 특히 신약성서학자 에른스트 캐제만(E.Kasemann, 1906~1998)과 만남을 통해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을 적극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큉의 신학, 특히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큉의 튀빙겐대 교수 부임 2년 후인
1962년 10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고, 그는 공의회 신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한다. 이 시기 그는 교회론에 집중하며 「공의회와 재일치. 쇄신, 일치에로의 부름」(1960), 「교회의 구조들」(1962), 「공의회에서의 교회」(1963) 등을 출판했다.
큉의 교회론 연구는 1967년에 출간한 「교회」에서 정점을 이룬다(이 책의 축소판 「교회란 무엇인가」는 1978년, 원저는 2007년 우리말로 출판됐다). 그는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의 연구를 종합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근거로 교회를 이해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