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23>발터 카스퍼(중)
개별 역사적 사실과 보편적 진리 아우르는 통합적 신학 전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학계에는 신앙과 교회의 주요 핵심 사안과 관련해 이전처럼 단일한 입장이 아니라 복수의 입장들이 공존하면서 작지 않은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특히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불리는 신학 노선들 사이에는 신앙과 교회 생활의 주요 진리의 의미를 둘러싸고 확연히 구별되거나 대립하는 입장이 평행선을 긋다시피 양립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신학 풍토에서 카스퍼의 신학은 한편에선 '자유주의적' 또 다른 한편에선 '보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외부 비판에 전혀 동요치 않고 '튀빙겐 신학자'로서 입장을 의연한 자세로 일관되게 유지해 오고 있다. "그들(튀빙겐 신학자)에게 보수적이고 진보적인 것은 서로를 배제하는 반대들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 양립불가하지 않고 보완적으로 작용한다. 이에 비해서 극단적 주장들은 항시 더 단순하다. 이와 반대로 극단들을 함께 응집시키고 가급적 함께 생각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이는 '조정하다'를 뜻하는 것이며, 이는 '신학은 생각해야 한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아니다."
카스퍼 신학의 인식원리
카스퍼의 신학은 방법과 내용 면에서 '튀빙겐 신학'의 입장을 오늘날의 역사 상황 안에서 충실히 대변한다. 이 신학의 인식원리와 방법으로부터 신앙의 핵심 진리 및 교회 주요 현안과 관련해 다른 신학자나 노선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입장을 형성하면서,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활동하는 다수 신학자들의 공감과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카스퍼 신학의 특성은 튀빙겐 학파의 전통 개념을 '신학적 인식원리'를 적용한 방법을 통해 신앙의 여러 진리를 구명하는 데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튀빙겐 신학의 전통은 재래 전통 개념과 구별돼 하느님의 자기전승으로서 계시에 관한 모든 진술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하느님 말씀이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시점과 공간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증여)로서 나자렛 예수로 강생했다는 믿음이다. 이는 바로 신앙 핵심이 그 내용과 현실 그리고 매개와 전체 지평 안에서 역사적임을 가리킨다.
고대에서 시작해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는 교회와 신학 안에서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이 기간에 역사나 역사적 변천 현상은 교회와 신학 안에서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상사적으로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근세에 이르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역사가 우주의 포괄적 질서 안에서 한 소인이 아니라 모든 질서 자체가 그것을 즉시 상대화하는 역사 내에서의 한 소인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면서 세계 실재 자체가 심층으로부터의 역사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초 튀빙겐 신학자들이 도모했던 그리스도 신앙과 역사의 만남이 한 세기 훨씬 지나고 나서야 가톨릭 신학계 안에서도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학자나 노선에 따라 신학과 역사의 만남이 상당히 상이한 방법으로 이뤄졌기에, 현격한 입장 차를 드러내는 여러 신학적 입장들이 형성돼 혼선을 빚은 것이다.
신학계에서 그동안 이뤄진 신학과 역사의 만남으로 종교사와 역사ㆍ비평적 주석학이 태동했다. 이로써 영원불변한 하느님 말씀이 담긴 성경의 역사적 제약성, 타종교로부터의 영향, 당대의 문학형식과 사고형식, 기술형식으로부터의 영향, 그들의 역사적 발전 그리고 그로써 주어진 개별 진술 사이의 긴장 상태가 속속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성서 진술이며 신앙 진리에 관한 역사적 인식은 교회의 많은 교리 체계나 구조형식을 역사적인 것으로 드러내면서 교계나 신학계에서 신앙과 역사의 문제 처리를 둘러싸고 서로 구별되는 입장들이 갈등을 빚는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카스퍼는 현대 신학의 이러한 갈등 상황 안에서 튀빙겐 학파의 전통 원리에 따라 작업을 수행해 왔다. 그에게도 전통은 살아있는 전통, 즉 사람들이 생활해 전수함으로써만 전승을 지닐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신앙 인식의 기초가 역사(특정 시간과 장소) 안에서 발생한 나자렛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전승의 계시로 규정된다. 그런데 계시와 계시된 것의 전달로서 전승이 중세 이래 지난 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명제(命題)처럼 생각됐다. 이것은 하느님 계시가 그 원천과 역사적 증거 안에서 명제들의 총합으로 이해됐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풍토 안에서 성경과 성전, 교도권 등의 문헌들이 초역사적 교리의 구성요소로 간주됐다.
하지만 카스퍼는 이러한 재래 전통 개념과 구별되는 튀빙겐 신학의 입장에 따랐다. 그는 전통을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현재화에 이르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요, 성령 안에서 이뤄지는 그리스도의 기억"으로 이해한다. 튀빙겐 신학자들이 내내 강조하는 '하느님의 자기전승'으로서 전통은 교회 역사를 거치면서 축적되고 물화(物化)된 소유자산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생활하는 신자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기전승은 교회와 신자를 전통주의로 속박하지 않고, 역사의 개방된 조류 안에서 미래의 길로 자유롭게 가도록 하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 따라서 카스퍼는 신앙 진리를 '추상된 명제로 구성된 교리 체계의 축적(蓄積)'과 간단히 동일시하지 않고 '교회 존재와 동일시되는 생동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카스퍼 신학 방법
카스퍼 신학은 튀빙겐 학파의 전통 개념에서 출발해 신앙과 신학을 조명하는 길을 걷는다. 여기서 교회성은 역사 진행에서 축적된 추상적 교리체계와 일치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주석이 늘 새롭게 이뤄지는 생동적 전통과 소통의 과정으로 들어서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입장은 성경 진술과 결정된 교리 사실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신학적 실증주의나, 이를 무리하게 하나의 체계로 압축하는 교리주의 입장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카스퍼는 역사적 개별 해석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신학적 개별 자료에 내재하는 활력에서부터 실재 일반의 종말론적인 궁극의 의미가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로 모든 것이 통합되는 체계적 연관성을 제시하는 것을 최대 관건으로 여겼다. 말하자면 그는 한편으로는 세계 안에서 발생한 다양한 역사와 개별적 역사적 사실(부분), 또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집중적이며 극적으로 주어져 있는 보편적 진리(전체)를 모두 중시하는 일종의 통합적 신학을 전개한다.
그의 이러한 작업방법은 '시대의 열린 조류 안에서 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보편적 신앙 진리로서 복음 진리의 의미를 온전히 구명하기 위해 성경과 전승의 개별적 자료에 대한 엄밀한 역사적 연구 작업과 교회와 세계의 열린 조류 안에서 성령을 통해 생동적으로 이뤄지는 계시의 종말론적 자기전승의 의미를 구명하는 작업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을 특정 과거 시점에 머물러 있는 고정된 교리 내용을 담은 보편적 진리 전체로 간주하기보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시 자체와 인격적으로 관련을 맺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카스퍼는 신앙 진리에 대한 역사적 개별 연구와 체계적 개관을 적절한 관계로 맺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제양성교령」의 가르침과도 부합한다고 본다. "교회 학문을 재검토하는 데에 있어서 우선 철학과 신학을 보다 적절히 조화시켜 학생들에게 인간의 전 역사를 관통하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점차로 명백히 이해시키는 단일 목적에 철학과 신학이 함께 이바지해야 하겠다"(14항).
지난 공의회 이후에 신학계 안에는 신앙 진리에 관한 역사적 개별 연구를 생략하다시피 건너뛰고 기존의 개관 내용의 정당성을 제시하는 작업에만 치우치는 입장들이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앙 전체의 성격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개별 진리에 관한 성서적거나 사변적 분석 작업, 세부 천착에 매몰되는 입장들이 목격된다. 카스퍼 신학에서는 특정 진리의 개별 연구 자체가 주된 연구 대상이 아니라 역사적 개별 해석을 유념하면서도 그리스도 신앙 전체를 살피며 앞으로 발생할 종말론적 차원의 실상을 구명하는 입장이 시종 관건이 된다.
그 때문에 그는 개별 논구 대상의 성경적이고 전승적인 근거뿐만 아니라 역사적 차원의 정신사적 발전 근거에도 주목하면서 이를 통해 도전을 받는 신학의 구체적 역사에 자기 자신을 세움으로써 보편적 신앙 진리의 종말론인 궁극적 면모를 제시하려고 진력하는 것이다.
카스퍼는 튀빙겐 신학의 이러한 입장이 인류 사회와 교회 안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주목하면서 그 신학적 의미를 구명하는 작업을 소홀히 한 채, 재래 신학의 내적 논리 체계 안에서 순수 사변 일변도로 아니면 성경 실증주의적으로 또는 교리주의적으로 보편적 신앙 진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다른 신학 노선과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소신을 피력해 왔다.
그는 다른 신학자와 논쟁에서 상대방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개진해 왔다. 그가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와 관계 설정과 관련해 라칭거와 벌인 논쟁을 통해, 또 라칭거의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이나 교황 재위 기간 중에도 평소의 소견을 일관되게 개진한 사실을 통해 신학자로서 그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