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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5-20 18:42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25>크리스토프 쇤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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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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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25>크리스토프 쇤보른


「가톨릭교회 교리서」편집 이끈 최고 신학자이자 사목자


크리스토프 쇤보른(Christoph Maria Michael Hugo Damian Peter Adalbert Graf von Scho"nborn)은 누구인가? 20세기의 다른 위대한 신학자들에 비해 아직은 낯선 이름이지만, 사실 그는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친숙한 사람이다. 바로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그의 손을 거쳐 최종 편집됐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임시총회에서 요청한 교리서를 편찬하기 위해 이듬해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책임을 당시 신앙교리성장관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 추기경에게 맡긴다. 교리서편찬위원회는 세계 각국의 주교와 전문가들과 협의해 작업을 진행했고, 마침내 1992년 교회의 신앙 진리를 제시하는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승인, 공포된다. 이어 1993년부터 다양한 제안 사항을 수렴하고 통합해 1997년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라틴어 표준판이 출간됐다. 이 교리서는 "가톨릭 교리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설명함으로써 교회가 일상생활에서 고백하고 거행하며 생활하고 기도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라틴어 표준판 승인과 공포에 관한 교황교서 '큰 기쁨'). 쇤보른은 라칭거 추기경에게 교리서 편집인로서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는데, 그의 신학과 사목과 영성이 교회 정신에 매우 부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생애와 사목활동 


 쇤보른은 1945년 1월 22일 보헤미아 리톰녜리체 서부 스칼겐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공직자와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를 무수히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그는 1963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해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보른하임과 빈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후 소르본대학교에서 동방 그리스도교를 연구했다. 1970년 12월 27일 빈에서 사제품을 받고, 레겐스부르크 대학교의 요제프 라칭거 문하에서 신학을 심화 연구하고 파리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스위스 프리부르대학교에서 교의신학과 동방그리스도교신학을 가르쳤다. 1980년 그는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이 됐고, 1987년 가톨릭교회 교리서 편집자로 위촉됐다. 1991년 빈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된 그는 1995년 교구장 주교가 됐다. 199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됐고, 신앙교리성, 동방교회성, 가톨릭교육성, 교황청 문화평의회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했다. 현재 2011년 새로 설립된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 위원으로도 활동하는 그는 사목자와 신학자로서 가톨릭교회와 세계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쇤보른의 뛰어난 사목적 역량과 신학 활동, 영적 가르침에 매혹을 느낀 많은 이들은 최근 두 차례 교황 선거에서 그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2005년 선거에서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의 쇤보른은 주요 교황 후보로 꼽혔고, 2013년 선거에서는 베네딕토 16세의 업적을 효과적으로 계승하며 보편교회의 일치를 증진할 이로 그의 교황 즉위를 예상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라칭거는 신학 교수 시절 많은 신학자와 사목자를 배출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그룹을 형성해 매년 시의적절한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2013년의 토론 주제는 '세속화의 상황에서 하느님 물음'이었으며, 쇤보른은 이 그룹을 이끌어 가는 대표로서 현대 신학의 심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빈대교구장, 복잡한 사목 환경 


 빈대교구장이 된 후 그는 어렵고 복잡한 사목 환경에 처한다. 오스트리아교회는 극단적 전통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이 공존한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가 교회다'(Wir sind Kirche) 운동이 이곳에서 출범했는데 현재 여성사제 허용과 결혼한 사제의 직무 복귀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최근 쇤보른은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사제 발의'로 알려진 급진적 성직자 운동과 마주했다. 2005년 시작한 이 운동은 오스트리아 성직자 10% 이상이 참여, 여성도 사제직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사제 독신제는 개인의 자유에 맡기도록 하고, 이혼 후 재혼한 가톨릭인과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체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2011년 '사제 발의'는 교황청에 대한 '불순종 운동'을 전개했고, 쇤보른 추기경은 이들을 만나 대화하고 경청하면서도 그들의 주장 자체를 공식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12년 9월 그는 "사제 독신제를 지지하며 사제직을 남성에게 국한한다"고 재확인하며, 사제서약에 위배되는 불순종 운동을 계속하는 이는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쇤보른의 이러한 자세는 교황청에서는 환영받았지만 급진주의자들에게는 반발을 샀다. 그러나 그는 교황청에 대해 건전한 비판을 아끼지 않으며, 동시에 전통주의자 주장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2009년 린츠교구 보좌주교로 게르하르트 바그너 몬시뇰이 임명됐는데, 그는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동성애와 낙태에 대해 하느님이 내린 형벌이라고까지 발언하는 극단적 인물이었다. 그의 주교 임명은 교구 사제들이 반대하고 오스트리아 주교회의에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쇤보른은 긴급히 로마에 우려 의견을 표명했고 이후 바그너 몬시뇰은 스스로 사임했다. 쇤보른과 주교단은 이 사건에 대해 교황청의 일방적인 주교 임명을 비판하며 교회의 성사적 본질을 강조했다. 


 같은 해 교황청은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르페브르 추종 주교들의 파문을 철회했는데, 그중에는 나치의 유다인 학살을 부인한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도 포함돼 있었다. 교황청 의도와는 달리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와 유럽의 교회는 큰 충격을 받고 가톨릭 신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쇤보른 추기경은 교황청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신자들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사목적 노력을 기울였다. 


 사제의 유아 성추행 사건으로 전 세계가 시름하던 때, 2010년 교황청 전임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은 공적 자리에서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은 '쓸모없는 잡담'이라고 발언했다. 쇤보른은 그가 이 위기에 대해 아무런 이해나 감각도 없다고 몹시 질타했다. 후에 교황청은 소다노 추기경과 쇤보른을 함께 불러 모았고, 소다노는 그 사건에 대해 큰 아픔을 느끼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는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의도였다고 해명한다. 과거 교황청은 사제 추문에 대해 진상규명보다는 은닉하고자 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 빈대교구도 유아 성추행 사건에 연루됐는데 쇤보른은 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하려 했지만, 교황청 국무원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아무튼 현재 교황청은 '불관용' 원칙으로 그러한 사건에 대처하고 있다.


 사목적 관심사


 쇤보른의 주된 사목적 관심사는 교회의 세속화와 교회 구성원의 교회 이탈 문제다. 그는 "우리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사람들이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인식하고 수용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청년들이 교회를 더욱 친숙하게 느끼도록 전통주의자들 반대를 무릅쓰고 전례 중에 조명을 설치하고 풍선을 띄우고 록 음악을 허용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또 성 스테파노주교좌성당에서 월 1회 교리강좌를 실시한다. 그리스도교의 심오한 진리를 간결하고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직접 대중에게 전달해 하느님 신비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도록 초대하는 자리다. 2005~2006년에는 창조와 진화에 관한 강좌를 개최하기도 했다. 진화 과학이론과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은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내용으로, 창조 신앙은 진화 과학을 습득하면서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강의는 2007년 「목적인가 우연인가? 성찰하는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창조와 진화」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에서 출발해 그리스도의 생애 신비를 다룬 2000년 대희년 강의도 활자화돼 중요한 영성서적으로 손꼽힌다(「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식하기, 신앙을 심화하기 위한 자극」, 2002). 그밖에도 2008년 하느님 자비주간의 강연 역시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2011)라는 책으로 출간, 자비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을 제공했다. 「행복한 생활」(2011)에서는 세상의 척도에 따른 행복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다. 이와 함께 그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책임편집인으로서 교리서를 주제별로 간략하고 명료하게 해설해 일반 신자들이 신앙 진리의 정수를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이 책은 「가톨릭교회 교리서 해설」(김정우 옮김, 대구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3)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쇤보른은 청년들 사정에 귀 기울이며 청년을 위한 교리서도 편찬했다. 오스트리아 주교회의는 2011년 세계청년대회를 맞이해 「유캣」(YOUCAT, Youth Cath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교리서를 출간, 「가톨릭교회 교리서」 내용을 청년들의 문화와 정서에 알맞게 전달했는데, 쇤보른이 총책임자였다. 이 교리서는 교회의 주요 가르침을 친근한 방식으로 풀이해 전 세계 젊은이들이 애독하고 있다. 


 빈대교구는 유럽의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사제와 신자들이 급감하는 추세다. 하지만 쇤보른은 여기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초대교회 공동체 경험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기존의 방대하고 비대한 교회 조직과 건물을 재편성해 본당을 통합ㆍ소규모화하며, 비어 있는 본당 건물은 평신도단체에 넘겨주고 가정과 직장이 신앙공동체가 돼 새로운 복음화에 이바지하도록 애를 쓰고 있다. 


 빈대교구장이자 추기경으로서 쇤보른의 뛰어난 사목적 역량은 분명 자신의 영성과 신학에 바탕을 둔다. 그에게 사목과 영성과 신학은 통합적으로 작용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느님 나라로 순례하는 교회, 끊임없이 정화 쇄신돼야


하느님의 인간 창조, 그리고 교회 


 교황청은 해마다 재의 수요일 직후 일주일간 영성수련을 가진다. 당연히 영성과 사목과 신학에서 깊은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이 피정 지도자로 선정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추기경 시절 바오로 6세 교황 앞에서 피정을 인도했는데 이때 피정은 「반대받는 표적」으로 출판됐다. 


 쇤보른은 1996년 대주교 시절 피정 강사로 초빙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교황청 위원들 앞에서 교회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 역시 책으로 나왔는데(「교회를 위한 삶, 교황님을 위한 사순절 피정 강의」) 한국어 번역본도 있다. 그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책임편집인답게 교리서를 십분 인용하고 해설하며 강연했는데, 피정을 시작하는 첫 마디 역시 교리서 제1항이었다. "스스로 한없이 완전하고 복되신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호의로 계획을 세우시고, 자유로이 인간을 창조하시어 당신의 복된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셨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항).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전달하시기 위함이다. 인간 편에서 보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생명과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부여하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순종과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십자가 죽음을 맞으셨고, 그리하여 십자가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빛을 내며 우리에게 전해지는 사랑과 구원의 사건이 됐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창조됐듯 이제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생명과 사랑으로 교회가 탄생했다.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생명을 받아 완성되도록 모든 이를 불러 모은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창조의 목적이 되고, 교회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질서 안에서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죄와 악에 대한 성찰을 꺼린다. 하느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악의 세력에 승리를 거두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 죄는 이미 용서받았고 세상 일은 모두 선으로 정향돼 있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한 말도 아니다. 죄는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사랑을 기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과 사랑의 일치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고 당신의 자유를 부여하셨다. 여기서 사랑은 강제나 억압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자유로이 사랑하고 자유로이 사랑받고 자유로이 응답할 때만 사랑이 실현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관계를 원하시기에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하느님과 일치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거나 배척할 수도 있다. 인간의 위대한 자유의 능력이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연유한다. 죄는 이 자유를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로 사용하는 데서 발생하다. 그래서 "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의 단절이며 동시에 교회와 이루는 친교에도 해를 끼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440항)고 교리서는 말한다. 원죄를 의식하고 죄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구원이 필요하다고 절감하게 된다. 십자가 위에서 전달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마음 깊이 수용하며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며 인류와 세상을 섬기는 구원의 성사다. 쇤보른은 교회를 사랑하기를 촉구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불완전하고 죄로 얼룩져 있지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기에 교회는 그 자체로 거룩하다. 동시에 교회는 이상적이고 완전한 사회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정화되고 쇄신돼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부활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듯,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고 일하고 고난받으며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간다. 우리는 교회의 품 안에서 사랑이 되어 세상에 사랑을 전하고 하느님 사랑의 품 안으로 귀향할 교회의 사람이다. 


 사제의 해에 사제의 직분 되새기며 


 2009년 6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사제의 해를 선포, 사제들이 내적 쇄신을 통해 현대세계에서 더욱 힘차고 분명하게 복음을 증거하도록 격려했다. 이어 9월 프랑스 아르스에서 일주일간 국제 사제피정이 열렸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제 1000명 이상이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고장에서 사제의 신원과 사명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숙고했는데, 이때 피정을 인도한 이가 쇤보른이었다. 그의 피정 강연은 「사제로 존재하는 기쁨, 아르스 성자의 발자취를 따라서」로 활자화됐다. 아르스의 성자는 "사제직은 예수님 사랑의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 자신을 바치며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 그리스도교 사제직의 기원이 있다. 


 사실 초대교회는 사도와 제자들에게 '사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 당시 유다교와 로마 제국 종교의 사제는 권력자이자 재력가였는데, 예수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해석학적 전환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섬기시고자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셨다는 점에서 다른 사제들과 확연히 다른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히브 5,10)라고 호칭한다. 그리스도교의 사제직은 다른 종교의 사제직과 달리 겸손과 사랑으로 낮추고 내어주고 섬기는 봉사직이다. 만일 그리스도교의 사제가 탐욕을 부리고 군림하려 든다면 스스로 제국 종교의 사제가 되려는 것이다. 비안네 성인이 아르스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꼬마 아이를 만나 길을 묻고는 말한다. "친구여, 네가 아르스로 가는 길을 내게 알려주었으니, 나는 하늘로 가는 길을 네게 알려주겠다." 


 사제는 예수님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세상에 전달하는 행복의 봉사자다. 예수님은 자비로운 연민의 마음을 가지셨다. 병든 이들, 굶주린 이들, 가난한 이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용서하고 치유하고 일으켜 주며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셨다. 자비가 없는 세상은 자기 정당화만 작용하는 황량한 영적 사막일 뿐이다. 고해성사는 용서하며 다시 살아나게 하는 하느님 자비의 성사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받을 때 우리 또한 이웃을 자비로이 용서할 수 있다. 고해성사 집전자인 사제 역시 먼저 고해성사를 겸손하고 성실하게 받아 주님의 은총을 경험해야 하느님 자비의 충실한 봉사자가 될 수 있다. 사제생활의 중심은 성체성사이다. 생명과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만나는 미사성제는 기쁨과 생명의 원천이다. 그런데 형식적이고 의무적으로 미사가 거행되는 경우가 많다. 쇤보른은 "우리는 과연 어떻게 미사를 준비합니까?"라고 물으면서 기도와 침묵,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식하며 미사성제를 정성스럽고 또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거행하도록 사제들을 격려한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하느님의 기쁨과 행복을 세상에 전할 수 있다. 


 창조 신앙, 진화 과학에 대하여 


 쇤보른은 2005년 7월 7일자 '뉴욕 타임스'지에 '자연 안에 깃든 계획 찾기'(Finding Design in Nature)라는 짧은 기고문을 게재한다. 무신론은 50년 전까지만 해도 특정 철학자들이 주창했는데, 이젠 유물론적 진화주의자의 신념과 주장이 됐다. 세상은 우연과 필연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 생성하고 발전하며 그리스도교의 창조주 신앙은 종교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6년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 총회에서 진화는 "가설 이상의 것"이라고 언급했고, 이에 대해 무신론을 표방하는 신-다윈주의자들은 가톨릭교회가 유물론적 진화주의를 수용 또는 인정했다고 여겼다. 쇤보른은 여기서 분명한 구분을 설정한다. 생명체와 우주 탄생, 발전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진화론은 과학이지만, 이와 달리 진화 원리에 입각해 처음부터 하느님을 배제하고 세상을 설명하는 진화론은 무신론적 세계관이다. 과학으로서 진화론은 가톨릭교회에서 존중하지만, 이데올로기로서 진화주의는 수용불가하다. 베네딕토 16세는 그의 교황 즉위미사 강론에서 "우리는 우연하고 무의미한 진화의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각에서 생겨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원하셨고 또 사랑하시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라고 밝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 과학을 존중하고 또 연구를 장려하고자 진화를 가설 이상의 것이라고 언급했고, 베네딕토 16세는 세상을 완성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을 강조하며 무신론적 이데올로기인 진화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2005년 가을부터 쇤보른은 창조와 진화, 이성적인 신앙을 주제로 빈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1년간 교리교수를 진행한다. 그는 창조 신앙과 창조주의를 구분한다. 창조주의는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를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해 이를 우주에 대한 역사 보고서로 전제하고, 6일간의 창조를 근거로 6000년의 지구 나이를 주장하기도 한다. 과학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진화 과학을 배척하는 창조주의 과학은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개신교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다. 흔히 창조를 믿는지, 진화를 믿는지 하고 물을 때 말하는 창조가 창조주의의 내용이다.

 가톨릭교회는 창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우습게 만드는 논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논쟁은 이성과 상반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다. 창조 신앙은 세상의 기원과 목적이 하느님께 있다고 고백하며, 세상에 깃든 하느님 생각과 섭리를 알아보고 우주 만물을 통해 창조주께 경배드린다. 진화 과학은 우주와 생명체의 진리를 더욱 깊이 알도록 하기에, 창조 신앙은 진화 과학의 도움을 받으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지혜롭고 오묘하게 만물을 창조하셨는지 인식해 창조주를 믿는 신앙을 심화할 수 있다. 창조 신앙은 창조주의와 진화주의의 양 극단을 배제하며 진화 과학과 상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쇤보른의 그리스도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자신의 역작 「나자렛 예수」 제2권 머리말에서 가톨릭 신학의 중요한 그리스도론 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크리스토프 쇤보른을 언급한다. 쇤보른이 2002년 출간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라는 제목의 그리스도론 작품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스위스 루가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와 앙리 드 뤼박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신학자들이 현대 신학 교재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가톨릭신학교과서협회(AMATECA)를 설립한다. 여기에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 스페인어권과 영어권 신학자들이 공동으로 종교학, 철학에서부터 기초신학,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성사론, 전례학, 사목신학, 교회법, 교회사, 인간학, 영성신학, 윤리신학, 사회교리, 종말론 등을 망라하는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신학교재 23권을 기획했고, 각 저작은 현재 꾸준히 출판 중이다. 이 시리즈물은 현대 신학의 전망 위에서 신학 개념을 충실히 소개하며 신학 교육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데, 세계 각국 언어로도 번역 중이다. 쇤보른은 가톨릭신학교과서협회 대표로 교재 편찬 작업에 적극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시리즈의 제5부 그리스도론 부분을 집필했다.


 위기의 그리스도


 쇤보른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많은 이가 종교를 심리학적 투사물이라고 주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만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만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살아계신 주님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리스도론을 한 채의 건물로 비유한다면, 이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은 성경과 전승, 경험이라 하겠다. 성경의 근거와 교회의 가르침, 믿는 이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이래 이 세 기둥이 차례차례 흔들리며 무너져 간다. 그 시작은 전승의 기둥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순수 복음을 왜곡한다고 전제하며 전승을 버리고 성경만으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승의 확실성이 파괴된 것이다. 그 다음 계몽주의가 도래해 역사학의 방법으로만 성경을 연구하면서 성경 또한 오류와 조작의 과정을 거쳐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성경 역시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어서 심리학이 등장해 종교적 경험을 다만 인간 욕구의 투사라고 이해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신앙생활을 심리적인 작용으로만 설명했다. 신앙 경험은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것이다. 전승과 성경과 경험의 세 기둥이 무너져가는 이때, 그리스도론이라는 건물을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는가.


 여기에 더해 쇤보른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긴장감을 조성한 세 가지 위기를 언급한다. 먼저 자연과학이 가져온 위기다. 근대 이전 세계상에서 인간은 창조계의 화관이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된 강생의 신비는 우주의 중심인 지구 위에서 피조물의 정점인 인간을 수용하는 사건으로 이해돼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생명체의 유구한 진화 과정의 한 단계이고, 지구는 우주의 극미한 한 부분이라는 인식이 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강생을 우주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구원사건이라고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두 번째는 역사의 위기다.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역사의 우연 진리는 필연적 이성 진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의식이 퍼졌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한 사건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또한 모든 역사 사건에 매여 있는 근원적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과거의 다른 역사적 인물이 현재에 던져주는 교훈 그 이상의 의미를 그분에게서 찾아내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쇤보른은 여기서 '신-아리우스주의'를 말한다. 많은 이가 예수님에게서 위대한 한 인간을 바라볼 뿐,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주님이신 그분의 신원을 망각하고 훼손하며 또 이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장 심각한 실존적 위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선포하는 교회의 구성원은 과연 그 진리를 증언하며 살아왔는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며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는가. 메시아가 왔다고 하는데 세상은 왜 여전히 고통으로 점철돼 있는가. 이러한 위기 상황을 마주 대할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는 신앙은 조작된 것처럼 보인다. 인간 예수를 하느님으로 신격화한 교회의 음모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실 이러한 위기는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줄기차게 감싸고 있었다. 그 근원적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에게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3)라고 밝혔다. 율법의 백성인 유다인에게 십자가는 하느님 저주의 표징이요, 지혜로운 그리스인에겐 어리석음의 상징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신명 22,22-23 참조). 


 희랍 철학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고통을 겪을 수도 배신을 당할 수도 죽을 수도 없다. 십자가 위에 죽으신 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신앙은 사람들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는다. 초대교회 시대 이방인 철학자 켈수스는 그리스도교를 조롱하며 말한다. "자신이 약속한 바를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한 그 사람을, 우리가 고발하고 심판하고 형벌 받을 죄인으로 단죄했을 때 숨어있던 그 사람을, 비겁하게도 도망쳤다가 소위 자기 제자 일당에게 배신당해 붙잡힌 그 사람을 어떻게 하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인가. 그가 하느님이라면 도주하지 말았어야 하고 체포되지 않았어야 하고 배반당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구원자, 위대한 하느님의 아드님, 기쁜 소식의 선포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가?" 


 켈수스의 말은 일리가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고 또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관습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초대교회 구성원 역시 이를 이해하기 매우 어려워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처음 예고하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한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흠모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죽임을 당하리라 말씀하시는데 과연 어떤 제자가 베드로처럼 행동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사람의 생각에서 보면 베드로나 켈수스의 입장이 훨씬 더 합당하지만, 하느님의 생각은 여전히 하느님의 생각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가 아무리 치밀하게 사유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생각을 결론으로 도출해내지 못한다. 


 초대교회 믿음에 주목 


 신학은 우리의 생각으로 하느님의 생각을 구축하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를 신앙으로 수용하고 이성으로 성찰하면서 심화된다. 하느님은 자유로우신 분, 당신의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유로 이뤄내시는 행위를 인간 편에서 속박할 수 없다. 신학은 하느님의 사건을 대면하며 그 안에 작용하는 하느님 논리를 찾아가는 것이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 이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분을 신격화해 하느님이라 불렀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화 됐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삼위일체 교의 및 예수님의 강생, 부활, 동정 마리아로부터 탄생 교의는 교회가 희랍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작하거나 미화한 내용이다. 


 그런데 역사적 궤적을 따라 진지하게 살펴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초대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신앙 고백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거부되고 박해받았다. 초대교회로선 혹독한 박해와 몰이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조작할 이유가 없었다. 쇤보른은 바오로 사도를 주목한다. "그분(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주님, '호 퀴리오스'는 구약성경에서 오직 한 분 하느님께만 드린 호칭이다. 바오로 역시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선포한다고 박해했는데,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하고 찬가를 부르고 있다. 근본적 전환이 발생한 것이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건은 바오로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이전의 그는 예수님을 갈릴래아의 위험분자, 신성모독자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제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는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분명히 밝힌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6).


   부활하신 분의 현현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는 의미가 있다고, 그분의 죽음과 지상 행적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지탱되고 또 의도됐다고, 그분의 말씀은 참되고 그분의 가르침은 올바르다고, 이는 모두 하느님 그분의 행위 자체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고와 관습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새로움을 알려주신다. 하느님은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둡고 절망스러운 곳,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오시어 죄와 고통, 유한성과 죽음을 당신 품 안에 껴안으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어둠을 아래에서부터 끌어안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 생명과 진리가 드러나고 전해지는 자리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성령의 거처로 성장해 나간다.


 노우재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1998년 사제수품(부산교구)

 ▲1999~2009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교의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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