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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5-20 19:43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1-33>앙리 드 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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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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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앙리 드 뤼박


교부와 신앙 유산에 대한 관심 제고로 공의회 개막에 공헌


교회로부터 가장 많은 의혹과 비난을 받았던 신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함께 교회와 신학에 쇄신을 불러일으켰던 신학자, 그가 바로 프랑스 예수회의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1896~1991) 신부다. 그는 명실공히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받아 추기경에 서임됐다.


생애와 새로운 신학의 개척


 95세까지 장수했던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은 1896년 프랑스 북부 캉브레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란 드 뤼박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는 예수회 고등학교를 나와 리용가톨릭대학 법학과에서 1년을 공부한 뒤 17세가 되던 해인 1913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당시 프랑스 예수회는 1905년 정부의 종교분리 정책으로 영국으로 추방됐기 때문에 드 뤼박은 영국에서 청원기와 수련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젊은 청년수사 드 뤼박은 1915년 군에 입대했지만 2년 뒤 베르댕 전투에서 오른쪽 귀 뒤쪽에 총상을 입고 의병제대했다. 이때의 부상으로 그는 평생 두통에 시달렸다. 


 군에서 제대한 드 뤼박은 곧장 영국에 있는 예수회 수련소에 다시 들어가 1919년부터 사제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여러 번 자리를 옮겨야 했는데, 캔터베리에선 문학을(1919~1920), 저지섬에선 철학을(1920~1923), 그리고 헤이스팅스의 오레 플레이스에서는 신학을 공부했다. 수련기 마지막은 프랑스 제2의 수도 리용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리용 시내 푸르비에르에 위치한 수련소에서 신학을 공부했다(1928~1929). 


 수련기에 그는 동료들과 함께 '팡세'라는 학술모임 성격의 동아리 활동을 했다. 지도신부는 드 뤼박의 스승으로 리용가톨릭대학 교수이자 후에 자신의 과목을 드 뤼박에게 넘겨준 알베르 발랑상 신부였다. 여러 가지 신학 문제를 고민하고 공부하는 이 학술모임에서 드 뤼박은 동료와 후배들을 이끌며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연구에도 몰두했다. 6년 후배인 스위스 신학자 한스 우르 폰 발타사르에게 교부들에 관해 더 연구할 것을 권고한 것도 이때이다. 


 앙리 드 뤼박 신부를 일명 리용-푸르비에르 신학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가 리용의 푸르비에르에서 수련기의 마지막을 보냈고, 1927년 사제품을 받고 난 뒤 곧바로 리용가톨릭대학에서 정년퇴임 때까지 교수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리용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갈리아 지방의 수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사도 교부인 이레네오 성인이 주교로 지냈던 곳이며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당시까지도 예수회가 운영하는 신학대는 파리가 아니라 리용에 있었다. 그리하여 수도에 위치한 파리가톨릭대에 견줄만한 훌륭한 철학자와 신학자가 리용가톨릭대에 포진해 있었고, 유럽에서 유학 온 학생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동양에서 온 유학생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를 비롯한 정양모 신부와 박상래 신부, 그리고 변규용 교수가 리용가톨릭대에서 공부했다.


 앙리 드 뤼박은 사제품을 받은 뒤 2년 동안 남은 신학공부를 마치고, 1929년 그의 나이 33세에 리용가톨릭대 신학교수로 임명됐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교수로 임명되는 바람에 박사과정을 밟을 수 없었다. 비록 박사는 아니었지만 교수로서 능력이 탁월해 처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1938년 새로운 방법론으로 그리스도교 교의가 내포하는 공동체적 특성을 밝힌 「가톨릭시즘」을 출간하며 신학계의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그가 대학에서 가르친 과목은 오늘날 '기초신학'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매우 생소한 과목이었다. 1930년에는 '종교의 역사'라는 새로운 과목을 신설, 타종교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특히 동양의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동양 종교와 신비사상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데에는 친구요 교구 신부였던 쥴 몽샤냉(1895~1957)의 역할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동료 신학자 가스통 페사르와 함께 독일 나치즘과 전체주의에 항거, 정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투쟁했다. 곧 반유다이즘적 이데올로기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잡지 「그리스도인 증거」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 신앙의 참된 의미를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다.


 원천으로 돌아가기


 교부들에 대한 커다란 관심으로 연구에 집중했던 드 뤼박은 1941년 예수회 동료 장 다니엘루 신부(초기 교회사 전공, 훗날 드 뤼박 신부와 함께 추기경으로 서임)와 '그리스도교 원천'(Sources Chre'tien nes, SC)이라는 유명한 시리즈를 창간했다. 책 이름 그대로 그리스도교 원천을 이루는 교부들의 문헌 총서를 말한다. 


 이 총서는 초기 교부들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신앙 유산인 교부들의 저서를 발굴하고 이를 원본뿐 아니라 비판적 해설을 덧붙여 프랑스 현대어로 번역, 출판한 것이다. 1942년 장 다니엘루 신부가 번역하고 해설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성인의 「모세의 생애」를 제1권으로 낸 이래 지금까지 70여 년 동안 564권을 출판했는데, 오늘날 교부학자들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신학자들의 신학 연구에 중요한 참고서가 되고 있다. 이 총서는 앞으로도 계속 출간될 것이다. 앙리 드 뤼박과 장 다니엘루 등을 위시해 프랑스 신학자들의 이와 같은 '교부들에게 돌아가기'를 통한 '원천으로 돌아가기' 운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드 뤼박은 이미 1910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신학잡지 '종교학 연구'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이 잡지는 당시의 새로운 입문학(入門學), 특히 역사학과 종교학의 발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해석했던 잡지다. 이 잡지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방법에 기초하지 않고 역사학적이고 실증적이며 해석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된 논문을 주로 실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도미니코회가 주축이 되어 토미즘(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토대를 둔 철학과 신학 사상)의 보급에 집중했던 「토미스트 잡지」와는 노선이 다른 것이다.

 

 오해와 시련기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드 뤼박에게 커다란 시련이 다가왔다. 그것은 오랜 연구 끝에 1946년 발간한 「초자연성에 대한 연구」가 로마의 도미니코회와 교회 당국으로부터 갖은 비난과 오해를 받게 되면서부터다. 이 책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재해석했던 신-스콜라 학자들의 은총론이 토마스를 오히려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줬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나는 순간 초자연적인 은총으로 불림을 받았고 인간에게는 자연인으로서 자연적 목적과 초자연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초자연적 목적 곧 하느님을 닮는 것, 초자연적인 본성에 참여하는 것임을 교부들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 전통을 통해 주장한 것이다. 


 사실 신-스콜라 학자들은 인간이 본래 자연적인 '순수본성'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고 상정했는데, 순수본성이란 은총도 죄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인간이 원죄로 말미암아 순수본성을 잃게 됐고,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 은총을 인간에게 베풀어 구원으로 이끄셨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순수본성을 상정한 다음 부패된 인간 본성에 초자연적 은총이 다가와 인간이 결국 초자연적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고 설명한 이유는 그만큼 하느님 은총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인간은 창조된 순간부터 초자연적인 목적(은총)을 향해 창조되었다'고 말한 앙리 드 뤼박의 주장은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을 축소시키는 것으로 비춰졌다. 이로써 드 뤼박은 토미즘을 유일한 신학으로 알던 당시 대부분의 신학자들에게 의혹을 받았다. 교황청에는 드 뤼박이 감히 유일한 신학체계인 토미즘에 반기를 든 위험한 '새로운 신학'의 주창자라고 고발하는 건의서가 빗발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예수회 총장 신부는 드 뤼박에게 리용가톨릭대 교수직을 박탈하고, 그의 개인 서고를 폐쇄시켰다. 사람들은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이 당시의 위험한 사조들에 대해 경고했던 회칙 「인류」(Humani generis)가 드 뤼박을 위시한 새로운 신학을 펼치는 이들을 제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지성적 존재들을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나아가도록 질서를 부여하지 않고 창조하실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을 지복직관으로 부르시지 않고 창조하실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초자연적 질서의 진정한 무상성을 해치는 이들"이라고 한 부분이 드 뤼박을 겨냥한 것으로 봤지만, 이 문장은 놀랍게도 드 뤼박이 이미 1년 전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논문 「초자연성의 신비」에서 썼던 그대로의 표현이다.


 인간이 초자연적 목적으로 나아가도록 창조됐다는 드 뤼박의 주장에 근거해 그를 경고한 것으로 보는 것은 모순이다. 그는 한 번도 교황청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 회칙으로 경고나 제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드 뤼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사실 교황청이 아니라 예수회 총장에 의해, 그것도 당시의 어수선한 상황 때문에 내려진 예수회 내의 제재가 전부였다.


그리스도교의 새로움과 그 신앙의 보편적 가치 제시



암흑기와 불교 연구 그리고 명예회복


 「초자연성에 대한 연구」(1946)로 예수회 제재를 받은 앙리 드 뤼박은 예수회 총장의 지시에 순종하고 1950년부터 1959년까지 리옹을 떠나 파리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이 암흑기에 불교에 관한 연구에 몰두해 세 권의 책을 냈다. 「불교의 관점들 I」(1951), 「불교와 서양의 만남」(1952), 「불교의 관점들 II, 아미타불」(1955). 동양의 신비주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드 뤼박에게 인류의 영성사가 제공해주는 방대함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의 위대한 유일성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한 확신을 갖게 했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의 보편성을 확인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영성 사상를 숙고하게 했다. 1954년에는 교회에 관한 아름다운 저서 「교회에 관한 묵상」(Me'ditation sur l'Eglise)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지금도 인용되는 유명한 저서로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1958년 그는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추대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1960년 8월 복자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위원'으로 임명됨으로써 그의 사상은 교회로부터 공인받게 됐다. 그는 공의회 개최 기간(1962~1965)에 신학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의회 모든 문헌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이때 드 뤼박은 젊은 독일 신학자 칼 라너와 요셉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 등과도 만났다. 공의회는 계시헌장에 나타난 성경과 성전의 유일한 원천, 무신론, 교회헌장, 비그리스도인 선언 등에 그의 사상을 수용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드 뤼박은 공의회 결과로 설립된 교황청 그리스도교일치평의회 산하 '비그리스도교인의 사무국' 위원으로 5년간 활동했다(1969~1974). 이 사무국은 유다교를 제외한 타종교와의 대화와 우호적 관계를 위해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공의회의 근본 정신에 대한 해설서를 내고 강연했다. 계시헌장과 사목헌장 등에 대한 그의 해설은 유명하다.


 마침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3년 2월 2일 드 뤼박을 이브 콩가르와 함께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그의 깊고도 위대한 신학사상이 교회에서 정통한 것으로 공인받게 됐다. 그가 87세에 사제에서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신학적 공로 때문이다. 드 뤼박 추기경은 1989년 93세 때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역사적 상황과 주요 주제를 다룬 책을 발행한 후, 곧바로 몸이 쇠약해져 파리의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했다. 몇 년간 병원 신세를 진 그는 1991년 9월 4일 생을 마감했다. 

 

 인품과 학문적 열성


 앙리 드 뤼박과 함께 살던 동료와 제자들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우 얌전하고 꼼꼼하며 신중한 성격이었다. 평생 연구에만 몰두했던 학자로서 공부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 날 수도원의 공동 방에 동료들이 모두 나가고 혼자 남게 됐는데, 방을 나서려는 순간 드 뤼박은 라디오가 켜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라디오를 끌 줄 몰라 한참을 씨름하다 결국은 포기했다고 한다. 그가 유일하게 다룰 줄 알던 기계는 타자기뿐이었다. 드 뤼박의 제자로 은퇴 후 많은 신학책을 펴내고 있는 세스부에 신부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자주 뒷목 통증을 호소하면서 저녁이면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방에 들어가서도 쉬기는커녕 다시 열심히 타자기를 두드려 동료들은 이런 그의 학문적 열성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천재성은 탁월하다. 그는 많은 교부의 책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유명한 사상가나 철학자의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중요한 구절을 편지봉투 뒷면에 메모해 두곤 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해하던 세스부에 신부는 어느 날 그의 방에 들렀다가 글씨가 빼곡한 편지봉투를 하나하나 넘기면서 직접 타자를 치는 스승 앙리 드 뤼박을 봤다. 이렇게 탄생한 원고가 곧 책으로 발행된 것이다. 


 사실 그의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교부의 글을 인용하고, 체계적인 목차도 생략하는 경우가 허다해 읽기가 지루하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지 않으면 무슨 주장을 펴는지 알기도 어렵다. 그저 한 주제에 대한 교부들의 진술을 모아둔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그 모든 교부의 언급이 자신의 주장을 펴는 중요한 신학적 논거로 정리돼 있다. 드 뤼박은 또한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이유로 어떤 사상에 대해 단순화해서 말하기를 피한다. 그만큼 신중의 신중을 기한다. 이러한 학문적 열성과 철저함으로 그의 책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도 인용되고 재판되며 중요한 참고서가 된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을 읽는 프랑스 독자들은 그의 프랑스어 문체에 혀를 내두른다. 그의 문체는 프랑스어의 분위기를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아 프랑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만큼 외국인에게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 앙리 드 뤼박은 인문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신학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초신학의 새 길을 열었다. 그는 역사와 타종교를 연구하면서 '그리스도 사건'의 위대한 유일성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졌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의 보편성을 확인했다. 【CNS】


 작품세계와 신학적 공헌


 그의 신학 작품세계는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폭넓고 다양하며 심오하다. 이탈리아에서는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전집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출간했다(1979).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를 추모하는 국제협회가 생기면서 Cerf 출판사를 통해 전집이 나오기 시작됐다. 총 50권으로 계획된 전집은 각 권이 600쪽을 넘는다. 현재까지 20여 권이 나왔다. 


 그의 작품은 주로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신학적 숙고를 담아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새로움과 그 신앙의 보편적 가치를 제시한 것이었다. 유명한 작품은 인본주의 무신론,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인식론, 신학적 인간학, 초자연성, 교회론, 불교에 관한 연구, 테이야르 드 샤르댕에 관한 저서 및 당대의 신학자나 철학자(모리스 블롱델, 에티엔느 질송, 쟈크 마리탱)와 교류한 사상교류집 등이 있다. 


 그의 신학 전반에 흐르는 사상은 당연히 인류에게 유일한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 그리스도의 새로움이다. 그리스도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신비나 인간의 신비, 그리고 역사의 신비를 읽어낸다. 그의 신학적 독특성이 드러나는 작품과 신학적 공헌도가 높은 것만을 추려 소개하도록 하겠다. 

 

 프랑스 기초신학의 선구자


 1929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리옹가톨릭대 교수로 임명된 그는 교수 임용 기념 교내 학술대회에서 '신학과 호교론'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 그는 당시엔 생소했던 '기초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 신학의 변화와 쇄신을 예고했다. 그 당시 신학은 주로 호교론(護敎論)과 신학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호교론은 가톨릭 신앙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믿지 않은 이들을 향해 제시하는 학문이다. 호교론은 신앙에 도전하는 유럽의 이성적 합리주의자들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지, 왜 그리스도교 신앙을 참된 진리로 믿어야 하는지를 '순수 이성적으로' 제시하는 데 몰두했다. 반면, 신학은 일종의 교의신학으로서 호교론을 통해 믿음의 정당성이 제시됐다고 전제하고, 교회가 믿고 있는 교의들을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드 뤼박은 이러한 호교론과 신학의 '외재적 관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의 신학은 믿음을 전제로 하거나, 수동적으로 변론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봤다. 보다 적극적으로 왜 믿어야 하는지를(호교론) 믿음의 내용(신학)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 믿음의 내용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실천)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드 뤼박은 1930년 '종교의 역사'라는 새로운 교과목을 맡게 돼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특히 힌두교와 불교에 심취했다. 사실 역사학의 발전은 '종교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는데, 많은 경우 종교의 역사적 탐구는 본연의 학문적 특성 때문에 많은 새로운 사실을 제공했지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고유성과 새로움을 간과하고 심지어 계시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상대화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종교가 인간의 근본적인 나약성에서 기원한다든가(심리학적 기원론), 사회와 문화의 발전과 함께 원시종교에서 고등종교로 발전해(사회-정치적 기원론) 훗날 없어질 것이라든가, 모든 종교가 근본은 하나라든가(신비주의적 관점) 하는 주장들에 맞서 드 뤼박은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초월성을 역사성 안에서 고려하면서 그 고유성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특히 1950년부터 불교에 대한 그의 심층적 연구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초월적 본성을 더욱 확신하게 했으며, 신비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 신비사상의 독특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는 데 노력했다. 이와 같이 드 뤼박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어떤 신앙신조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인문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신학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그리스도교 계시나 역사, 교회의 생활 전체를 일관성 안에서 다시 숙고하는 기초신학적 자세를 정초했다.



"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 며 미사 참례의 신비 되새겨


   

  새로운 신학 방법론, 원천으로 돌아가기


 앙리 드 뤼박은 당시 주류를 이루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추종하는 신-토미즘(신-스콜라 신학)과 다른 방식의 신학을 했다. 본디 신??스콜라 신학은 교회를 위기로 몰았던 이성주의(합리주의)에 맞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해야 했기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순수 이성(철학)에서 출발해서 호교론적 신학을 펼쳤던 것이다. 그들에게 토미즘(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신학)은 당대의 합리주의, 무신론적 이데올로기, 과학지상주의 등 모든 반그리스도교 사상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로 여겨졌다. 


 이미 레오13세 교황은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1879)를 통해 모든 신학교에서 토미즘을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했고, 토미즘을 최고의 사상이요, '영원한 철학'으로 여기게 했다. 그런데 앙리 드 뤼박과 그를 중심으로 하는 젊은 신학자들, 예컨대 예수회의 게스탕 페사르(G. Fessard), 오귀스트 발랑생(A. Valensin), 이브 몽셔이(Yve de Moncheuil), 앙리 부이야르(Henri Bouillard)와 같은 신학자들과 역사학적 방법론으로 토미즘을 새롭게 해석했던 도미니코회의 슈뉘(M, Dominique Chenu)와 이브 콩가르(Yve Congar) 등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에 바탕을 둔 신학 방법에서 탈피해서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신학에 적용했던 것이다. 


 그를 특징짓는, 교부들에 대한 연구는 단지 과거의 신앙 진술을 반복하거나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교부들이 자기 역사 안에서 어떻게 신앙의 진리를 살아 있는 진리로 파악하고 진술했는지를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살핀 다음 그로부터 당대의 문제를 푸는 해결책을 끌어내고 제시하는 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단지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復古主義)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가지고 있던 신앙의 풍요로움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고, 당대 이성주의에 입각한 신앙 해설이 갖는 위험을 타파하는 것이다. 때문에 드 뤼박은 자신을 '고전적 신학'의 방법과 대립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신학자'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았고, 오히려 정당한 의미로 '전통적 신학자'로 불리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기득권을 가졌던 로마의 도미니코회 신학자들(Garrigou-Lagrange)과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신-스콜라 신학자들(Labourdette, Bruckberger et Nicolas)은 그들의 스승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미 성경과 교부를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토미즘을 연구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고, 드 뤼박의 전통으로의 회귀는 복고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오해했다.

 

 외부주의 신학의 극복


 앙리 드 뤼박이 일생 싸워야 했던 적은 외부론적 신학방법론이었다. 이 외부론적 신학을 펼친 이들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신-토마스주의자들이었다. 당시의 신-스콜라 신학자들은 자연의 세계와 초자연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하고, 양자가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 구조로 봤다. 또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는 기이한 현상으로 보고, 기이한 현상의 사실 자체를 증명하는 데에 만족했다. 당시에는 근대의 이성주의 영향으로 초이성적인 것을 배제하며 이성적인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초월적 진리인 신앙적 진리를 배제하고 순수 이성적으로만 접근한 다음, 이성적으로 밝힐 수 없는 기적과 예언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증명하는 데 급급했다. 자연적으로 알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도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 더욱 확고해지므로 그리스도교야말로 절대적인 종교로 증명했던 것이다. 


 이러한 외부론적 신학사상은 드 뤼박이 볼 때 교회의 전통적 초자연성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예로 인간 이해를 든다. 인간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 모상'대로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 이미 초자연적인 목적이 새겨져 있는 것이지 신-스콜라 신학자들처럼 자연적 존재로서 순수상태였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본성이 파괴된 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의 한순간에 개입해 인간을 구원하심으로써 인간에게 또 다른 목적인 초자연적 목적을 추가로 받게 됐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렇게 설명하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은총이 더 부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순수 자연적 본성을 지닌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설명은 역사적 실재와는 무관한 추상적 설명일 뿐이다. 


 드 뤼박의 주장은 이렇다. 성경과 교부들의 일관된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여러 자연적 존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본래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된 하느님의 모상이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향하는 하느님의 영을 풍부하게 받았으며,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자기 인격을 완성하는 존재다. 인간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과 영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至福直觀)이고, 하느님의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적 존재로 보이는 인간 안에 이미 초자연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의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자연적 열망'이라는 교리를 통해 강조했다.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초월성


 그의 이러한 외부론적 사상의 극복은 그리스도교 이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역사학의 발달은 그리스도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를 역사학적 입장에서 다뤘다. 이들은 외부론적 신학자들이 구축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부정했다. 역사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자체도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난 하나의 종교이기에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절대성, 계시 종교로서의 초자연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보았다. 드 뤼박은 이를 초자연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여겼다. 초자연성은 저 멀리 다른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초월성은 내재적 초월성으로서 역사의 시작부터 역사의 종말까지 역사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말한다. 하느님을 저 세상에 홀로 계시거나 인간의 마음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살아 계시면서 역사를 이끄시는 영(靈)으로 이해했다(「영과 역사」, 1950).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서 발전해 왔다는 면에서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만을 본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에 숨어 계시면서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나타남을 이루신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교는 신적인 것이며 그러한 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초월성은 '외부적 초월성'이 아니라 '내부적 초월성'이다. "사상이나 신조들의 계보로 촘촘히 짜인 조직을 가로질러 균열이나 찢김도 없이 새로운 영, 곧 성령이 지나갔다. 성령은 부드럽게 스며들어왔으나 강력하게 드러나게 했다. 성령은 인간의 역사를 관통했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변했다.… 이것은 진정한 창조다. 그리스도의 영이 온전히 새로운 그리스도의 종교를 세웠다." 

 

 교회의 신비, 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 


 그러므로 드 뤼박은 교회를 숙고하며, 교회를 단지 교리체계나 사람의 조직으로 보지 말고, 그것을 가능케 한 하느님 활동으로 볼 것을 강조했다. 교회가 신자 모임으로만 여겨지는 것에 대항해서, '교회'라는 용어 자체가 부름을 받아 모인 것임을 강조하며 모임이라는 결과보다 그것을 가능케 한 부름이 더 근본적인 것임을 자주 상기시킨다. 그는 교회의 여러 표상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신비체인 교회의 표상을 강조했다.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 성찬례와 교회를 말하면서 "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성찬 거행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의 몸(성체)을 우리가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성찬거행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룬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종말에 이뤄질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9-10). 


 이 종말에 이뤄질 은총이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에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는 구원의 수단, 아니 위대한 구원의 수단이며 동시에 창조의 목적, 아니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다. 교회는 가시적인 몸이며 동시에 신비롭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동시에 이 길의 종착점인 생명 자체이시다. 교회를 이와 같이 생각할 때 교회는 구원의 길이요 동시에 종점이다. 교회는 구원의 실재인 영적인 단일체이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교회를 이룬다는 신비를 오늘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앙리 드 뤼박은 초기부터 신학과 교회의 쇄신을 이룬 신학자였다. 성경과 교부들에게서 전해진 그리스도의 진정한 새로움을 깊이 숙고하며,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면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드 뤼박은 한국 신학자들이 배워야 할 신학자이다. 특히 드 뤼박은 추상적인 신학을 펼쳤던 신-스콜라 신학에서 벗어나 신앙 자체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삶과 실천적 진리이며,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영원한 새로움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그로부터 오늘의 쇄신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곽진상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1993년 사제수품(수원교구)

 ▲2005년 파리가톨릭대 기초신학 전공. 신학박사

 ▲2005~2006년 범계본당 주임

 ▲주요 논문 및 저서 : 「통교된 생명으로서의 신앙: 앙리 드 뤼박 안에 나타난 신앙내용과 신앙 행위의 관계」(파리, DDB, 2011), 「앙리 드 뤼박의 신학사상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간이해」(2010), 「앙리 드 뤼박의 초자연 신학과 은총에 대한 비판적 이해」(200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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