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일( 요한 3, 31-36) - 1598

Author
kchung6767
Date
2019-05-01 04:19
Views
1080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598
2019 년 5월 2일 목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일( 요한 3, 31-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 31)

오늘은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먼저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열러분 모두게에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죽음을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원으로 가는 가교로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 31) 는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바로 사람의 아들을 믿는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니마밈’이라는 노래를 생각나게 합니다. 나는 믿는다는 뜻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부터 유대인들이 지내는 빠스카 행사에서는 꼭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악명이 높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유대인들에 의해서 작사 작곡 되어 불러졌던 노래입니다..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고생을 하던 유대인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가사를 보면,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 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간단하고 짧은 노랫말입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희망을 담고서 반복해서 불렀던 것입니다. 이노래를 부르면서도 죽음을 향해서 끌려가는 동료들의 모습을 볼 때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들은 이 노래에 한절의 가사를 덧붙여서 부릅니다. 추가된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이들중 한 젊은 외과의사는 결코 그 마지막 가사를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 속에 시편 139장 8-10절의 말씀을 간직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9 제가 새벽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 해도 10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시편 139, 8-10)

이렇게 그는 어떠한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비록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가면서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믿음으로 석방되는 그 순간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죽지 않고 수용소 문을 나오게 됩니다.

석방이 된 후 그는 그 노래의 가사를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사람들은 너무 서둘러 믿음을 포기한다.“ 로 정정해서 부릅니다.

그 후 그의 일기가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그 일기 속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가장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그렇게 서두를 것이 못된다. 죽음 앞에서 살아 보려는 부활의 의지, 이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해마다 빠스카 때가 되면 친척들을 불러 놓고 수정된 아니마밈의 영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수용소에서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고난을 받을 때에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난앞에서 희망을 하느님께 둘 수 있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현실을 넘어 저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강렬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믿기 때문에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밝은 미래를, 저 높은 곳을 바라봅니다. 이 확고한 믿음이 바로 인간에게 순명하지 않고 하느님께 순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절정은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 36)

당신의 아드님께 전권을 위임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여기서 믿음과 순명은 떨어진 의미가 아닌 함께가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에는 바로 아드님께 순명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위에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나약한 저희들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어둠과 절망과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항구한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성실함이 믿음입니다. 한 외과의사의 성실한 믿음이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저에게 성실한 믿음의 삶을 살게하는 하루이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다시 한번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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