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루카11,14-23) - 1569

Author
kchung6767
Date
2019-03-27 03:07
Views
1050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569

2019년 3월 28일 목요일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루카11,14-2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에게 23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예레 7,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 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11, 23)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는 두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영적인 눈과 세상적인 눈이 있습니다. 둘 다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겉으로는 보이는 것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찾습니다. 하지만 세상적인 눈은 이와 반대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하는 눈입니다. 어둠의 세력은 우리에게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악령이 들어가 이들의 눈을 뜨게한 바로 그 눈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게 하는 눈입니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일에든 좋든 싫든 핑계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좋은 의미로 쓰여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책임지기를 싫어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책임 전가에는 천부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만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는 극도로 소극적임을 드러내는 말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서에서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예레 7, 23)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의 단호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다른 많은 길들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슴을 은연 중에 보여줍니다.  이러한 많은 길 중에서 주님께서 명령하는 길을 선택하라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주님께서 명령하신 길만 온전히 걷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이 잘됨은 세상적인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입니다.

이 말씀의 연장선 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예’와 ‘아니오’의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서기위해서는 사탄을 향한 단호한 태도가 필요함을 강조하십니다.  사탄과 예수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삶은 결국에는 사탄의 전략에 넘어가는 것이기에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응답해야 함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이전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기도는 바로  시편 1편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것을 의미할 것’ 입니다.  바로 이 기도가 사탄을 향하여 단호한 태도를 갖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느님의 뜻과 사탄의 뜻을 식별하는 지혜와 영적인 눈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것을 청한다면 하느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더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제대로 기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서는  놀라워 하는데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 낸다.”하고 말했습니다.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은 열왕기 하권 1장 2절 “아하즈야는 사마리아에 있는 자기 옥상 방의 격자 난간에서 떨어져 다쳤다. 그래서 그는 사자들을 보내며,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게 가서 내가 이 병에서 회복될 수 있는지 문의해 보아라.” 하고 일렀다.”에 나오는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서 유래한다고 말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마귀 두목의 이름으로 베엘제불과 사탄을 같이 사용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 안에는 벌써 마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마귀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쫓아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함하기에 참으로 좋은 전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이 거짓이고 논리적으로 모순 임을 지적하시며 그들을 공박하시고 자신을 오히려 베엘제불 보다 더 강한 존재로서 베엘제불과  대립하는 위치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23절의 말씀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이 말씀은 마귀의 세력과 예수님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예수님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귀 편도 아니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 아니면 “아니오”라는 대답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마귀의 권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사탄에 협력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며 따름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는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합력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 백성을 흩어지게 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목적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4-26절은 예수님께서 23절 말씀의 의미를 다시 비유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에게서 쫓겨 나간 더러운 귀신이 자기가 머물 만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찾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는 와서 보고, 그 집이 깨끗이 청소되고 수리되기는 했는데 거기 들어와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살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나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요점은 깨끗하게 청소된 집이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나갔던 사탄이 더 많은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으면 더러운 귀신을 다시 불러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한 귀신이 아니라 일곱 귀신 즉 온갖 귀신이 함께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삶의 상태는 전보다 더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을 이기는 삶의 방식은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뜨거운 열정으로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시편 1, 1-2) 하루를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하느님의 계명 만을 온전히 지키는 하루를 살고자 다짐합니다.

Total 2,626
Number Title Author Date Votes Views
2586
희망의 시작 -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사랑(루카 4, 24- 30) - 3148
신부님 | 2024.03.02 | Votes 3 | Views 681
신부님 2024.03.02 3 681
2585
희망의 시작 -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15,1-3.11ㄴ-32) - 3147
신부님 | 2024.02.29 | Votes 3 | Views 688
신부님 2024.02.29 3 688
2584
희망의 시작 -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와 결과(마태오 21,33-43.45-46) - 3146
신부님 | 2024.02.28 | Votes 2 | Views 659
신부님 2024.02.28 2 659
2583
희망의 시작 - 하느님의 공정하심(루카 16,19-31) - 3145
신부님 | 2024.02.27 | Votes 3 | Views 756
신부님 2024.02.27 3 756
2582
희망의 시작 - 무엇을 원하느냐?(마태 20, 17-28) - 3144
신부님 | 2024.02.26 | Votes 2 | Views 744
신부님 2024.02.26 2 744
2581
희망의 시작 - 두 대조적인 자유의 모습 (마태 23, 1-12) - 3143
신부님 | 2024.02.25 | Votes 3 | Views 664
신부님 2024.02.25 3 664
2580
희망의 시작 -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순시기(마태 6, 36-38) - 3142
신부님 | 2024.02.24 | Votes 3 | Views 706
신부님 2024.02.24 3 706
2579
희망의 시작 -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마태 5, 43-48) - 3141
신부님 | 2024.02.22 | Votes 3 | Views 627
신부님 2024.02.22 3 627
2578
희망의 시작 - 참 사랑 위에 위치한 의로움(마태5,20-26) - 3140
신부님 | 2024.02.21 | Votes 4 | Views 658
신부님 2024.02.21 4 658
2577
희망의 시작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마태 16, 13-19) - 3139
신부님 | 2024.02.20 | Votes 3 | Views 630
신부님 2024.02.20 3 630

Enquire now

Give us a call or fill in the form below and we will contact you. We endeavor to answer all inquiries within 24 hours on business 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