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보니파시오 성인 축일에(마르 12, 1-12) - 1005

Author
kchung6767
Date
2017-06-04 08:13
Views
2342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005

2017년 6월 5일 월요일

보니파시오 성인 축일에(마르 12, 1-12)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 12,10)

 

오늘은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는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잘 듣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잘 듣는 것과 어머니 말씀을 잘 듣는 것과는 의미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예로 우리는 ‘부자’들을 보고 저집은 ‘참 잘 사는 집’이라고 말하고 ‘가난한 집’을 보고서는 ‘못사는 집’이라고 말합니다. 엄청난 의미의 차이가 있슴에도 불구하고 의식없이 그렇게 써 왔던 것입니다. 말이 나의 생각을 지배하고 그 생각이 나의 삶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은 자신의 지식을 증가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듣는다는 의미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나의 삶을 바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나의 행동양식을 어머니의 뜻에 따라서 바꾸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부자는재산이 많은 것이지만 ‘잘 산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것은 재산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못 산다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엄청난 의미의 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구분이 없이 자연스럽게 혼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혼용이 선과 악의 구분마저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이 목적이 되는 삶과 내가 목적이 되는 삶의 혼용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죄는 바로 하느님이 주인이 되는 삶을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여태가지는 하느님이 나의 삶의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됩니다. 이런 엄청난 죄악의 삶을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의식없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포도밭인 당신의 백성들을 소작인으로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권위를 외면한 채 주인이 보낸 많은 심부름꾼들을 냉대하고 때려 주고 나중에는 죽여 버림으로 정면으로 주인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주인은 자기 외아들을 보내면 소작인들이 꼼짝 못하려니 했으나 외아들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진노한 주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모조리 살해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기 위주로 해석을 하고 자기 위주로 듣기도 합니다. 내가 위주가 되면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인 것을 지배해 버립니다. 삼자적인 눈과 귀는 사라지고 삼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든 것이 주관적인 것으로 흡수되어버립니다. 객관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전인수적인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이려 한 계획과 또한 그 실질적인 살해행위가 전혀 이유없는 또는 완전히 어리석은 짓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실질적인 상속법에 따르면 상속자가 없는 지주가 죽었을 경우에 그 소유지는 먼저 점유하고 있는 사람의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소작인들은 이렇게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던 포도밭이 자신들의 소유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갖게될 분노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 소작인임을 모릅니다. 다윗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회개하지 못할 때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보내셔셔 그가 회개하도록 하지만 그 순간 나탄 예언자의 비유가 자신에 대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도 자신들이 바로 그 비유 안에서 등장하는 소작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죄를 지은 당사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의 티는 보여도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목적이 되고 주신이 주인이 되면  주관이 객관을 덮어서 모든 지각 능력을 왜곡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자신과 하느님의 위치를 바꾸지 않는 하루를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일을 바라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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