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본질을 잃지 않는 삶 (마르 9, 41-50) - 1310

Author
kchung6767
Date
2018-05-23 01:42
Views
1249
  •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310

2018년 5월 24일 목요일

본질을 잃지 않는 삶 (마르 9, 41-50)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 42)

작금의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말조차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간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례들이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의 연장 선상에서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의 손에 피를 묻혀서 열매 만을 따 먹는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죄짓게 하고 자신들은 그 이익을  취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잘 아시고 ‘당신을 믿는 가장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죄를 짓게하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당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마르 9, 42) 고 하시면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매순간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유혹에 노출 되어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죄의 유혹에 대면해서 단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유혹은 너무나 교묘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쉽게 넘어갑니다.  댐이 아주 조그마한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것과 같이 사소한 죄의 용납이 더 큰 죄를 용인하게 되고 이러한 용인이 우리의 죄의식을 무디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당신을 믿고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사형시키는 형벌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사용하던 사형 방법 중의 하나였는데 유대인들은 이 형벌을 주검을 땅에 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 형보다 더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의 벌의 엄중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은 큰 죄이고 이 죄에 대한 벌도 무섭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눈과 그리고 우리의 눈이 죄를 짓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예로서 우리의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한다면 잘라버려야  하고 눈이 죄를 짓게 한다면  그것을 빼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같은 내용을 표현만 바꾸어서 43, 45, 47절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은 이 가르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괄호에 44, 46의 번호만 나오고 성경의 구절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구절들은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8절의 말의 반복입니다.  

이 구절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나를 거역하던 자들의 주검을 보리라. 정녕 그들의 구더기들은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한 채 모든 사람들에게 역겨움이 되리라.” 는 이사야서 66장 24절에서 가져 온 표현인데, 악인들이 받을 영원한 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주요 필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성경의 본문으로는 인정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번호로만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리스어로 ‘게헨나'를 말하는데 , 이 말은 원래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벤 힌놈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기원전 622년 유다 왕 요시아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곳에서 '몰렉'이 라는 이름의 신에게 어린이들을 제물로 불살라 바쳤는데, 요시아 왕이 그런 짓을 못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우상 신에게 제물로 바친 일 때문에 그곳은 '저주받은 골짜기'가 되었고, 나중에는 종말에 죄인들이 갈 곳(지옥)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는데  '지옥 불'에 대한 표현도 거기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불과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불은 불순물을 태우고, 소금은 썪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49)는  말씀은  '종말에 앞서 모두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인 사랑을 소금으로 비유한다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어 버리는 것이 바로 소금이 짠 맛을 잃어 버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죄의 유혹을 이겨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죄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죄를 안짓겠다는 소극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죄를 지을 기회를 없애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소금의 짠맛을 간직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죄의 유혹을 이겨내는 하루를 주님께 봉헌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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