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론

희망의 시작 - 연중 제 24주간 -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루카 15, 1- 32)

Author
kchung6767
Date
2019-09-14 02:21
Views
1244
연중 제 24주간 미사

2019년 9월 15일 일요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루카 15, 1- 32)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 10)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 20)

 

최근의 한국의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이 됩니다. 정치인들 때문에 실망하고 분노하는 저 국민의 마음을 누가 어루만져 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신부로 살아가면서 지금처럼 한계를 느껴 보기도 드뭅니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저희들에게 이러한 시련을 이겨나가는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모습 이어야 하는 가를 주님께 여쭈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땅을 산 것을 보고 배아프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당연히 살아갈 수 있다고 답하겠지만 실제 삶을 살아가면서 이를 실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내가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와중에 나의 이웃이 성공한다고 하면 이를 두고서 마음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두고서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불평을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고서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것은 당신을 떠나갔던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못마땅 해 합니다. 흔히 우리 말로 딴지를 겁니다. 왜 이들이 예수님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예수님을 견제할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이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삶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되지나 않을까 하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말을 합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주장하지만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아닌 타인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이 변화하기는 싫어하고 타인이 변화하기를 바라는 삶입니다.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변화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세상의 통념을 깨고 섬김을 받든 것이 아닌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도자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타인이 변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신의 변화를 통해서 국민에게 희망과 비젼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나의 행복이 아닌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불행도 감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은 놓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이웃을 위해서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회적인 제도나 시스템이 참으로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 함을 강조하는 사람이 반가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수의 희생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았던 사람들이 싫어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서 투덜거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 속에도 이들의 모습이 남아 있슴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나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속하고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이기도 할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회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가 필요한 내가 다시 회개를 하고 당신께로 돌아오면 크게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바로 이 삶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둘째 아들의 회심에 관심을 둡니다. 그런데 아들의 돌아옴도 중요하지만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마음을 느껴 본다면 그렇게 쉽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아버지 저에게 주실 유산을 미리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그냥 성경은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말이 나오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이 아이가 벌써 내가 죽기를 원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고 이 아이는 아버지인 나보다는 돈에 더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덧붙여서 이 아들은 아버지가 나누어 주는 자신의 몫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모두’라는 말과 ‘먼 고장’이라는 말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왜 복음서는 ‘모두’와 ‘먼’을 강조할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이 아들은 아버지와 완전한 결별을 원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하는 삶이 자신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었으면 이렇게 아버지의 시양에서 완전히 떠나고 아버지의 흔적을 남기지 않게 모든 것을 걷어서 떠났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우리가 하느님 종으로 살면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하느님을 떠나면 그 떠난 이유의 종이 되어 살아야 함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을 자유까지 보장해 주셨지만 세상은 우리를 자신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아들은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세상에는 존재가치는 없고 소유가치만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사라지고 인간의 모습만 존재합니다.

세상에서의 자유란 타락을 말합니다. 이 자유를 만끽한 아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됩니다. 그가 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지만 머뭇거리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받을 줄 것인가? 용서해 주실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그러한 아들의 닫혀진 마음과는 달리 그가 떠난 뒤에도 아들을 향하여 당신의 마음을 열어놓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줄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강제로 돌아오게 하실수도 있지만 그에게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큰 사랑의 절정은 아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애태우며 기다림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용서였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아들의 모든 잘못은 덮어졌고 자신의 모든 것이 회복 되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닫혀진 마음으로 살아가면 아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아버지는 없고 자신을 구속하는 아버지만 보입니다. 벌하고 야단치는 아버지만 보입니다.  마음을 열고 아버지를 바라보면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돌아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한주간, 하느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거룩한 한 주간을 지내시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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