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론

희망의 시작 - 사순제 4주간 - 아버지와 탕자와 첫째 아들(루카 15,1-3.11ㄴ-32)

Author
kchung6767
Date
2019-03-30 15:17
Views
1181

사순 제 4주간

2019년 3월 31일 일요일

아버지와 탕자와 첫째 아들(루카 15,1-3.11ㄴ-32)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 31)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가장 잘 알려주는 비유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의 복음일 것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은 회개하는 아들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풀이 죽어 돌아 오는 아들을 사랑으로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 순간의 모습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종으로 살면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누리지만 하느님을 떠나면 그 떠난 이유 때문에 세상의  종이 되어 살아야 함을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을 자유까지 보장해 주셨지만 세상은 우리를 자신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아들은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세상에는 존재가치는 없고 소유가치만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사라지고 인간의 모습만 존재합니다.

하느님의로부터의  자유란 타락을 말합니다. 이 자유를 만끽한 아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됩니다. 그가 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지만 머뭇거리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받을 줄 것인가? 용서해 주실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그러한 아들의 닫혀진 마음과는 달리 그가 떠난 뒤에도 아들을 향하여 당신의 마음을 열어놓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줄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강제로 돌아오게 하실수도 있지만 그에게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큰 사랑의 절정은 탕자의 삶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애태우며 기다림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용서였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아들의 모든 잘못은 덮어졌고 자신의 모든 것이 회복 되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닫혀진 마음으로 살아가면 아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아버지는 없고 자신을 구속하는 아버지만 보입니다. 벌하고 야단치는 아버지만 보입니다.  마음을 열고 아버지를 바라보면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두 말없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참아주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친절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다른 한 사람은 바로 탕자의 형입니다. 그는 죄인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이 준수하는 율법으로 단죄하는 전형적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형은  율법의 본질인 사랑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율법주의의 잘못은 소극적인 “하지말라”는 금지의 규정만을 엄격히 따르는 데 있었습니다. 형의 마음에는 의무의 외적인 실행은 있어도 의무의 내적인 사랑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율법준수를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기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극단적인 율법규정의 적용 만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보호를 위해서 존재하는 율법이 어느 순간에 인간을 지배하는 규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래의 존재의 이유를 회복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율법이나 규정이 우리를 지배하게하는  신앙이 아닌지, 바로 형과 같은 종교를 갖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닫혀진 마음으로 살아가면 용서와 사랑의 아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보다는 판단하고 단죄하는 형의 모습만 보이게 됩니다. 사랑의 아버지는 없고 자신을 구속하는 아버지만 보입니다. 벌하고 야단치는 아버지만 보입니다. 

마음을 열고 아버지를 바라보면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단죄하는 형의 모습을 보면서 바로 내가 넘어서야 하는 모습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순시기도 이제 중반을 넘어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분의 부활을 향한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 어리석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참 사랑의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과 영광의 삶으로 가기 위한 지금의 고통과 시련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믿고 잘 이겨나가는 축복의 시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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