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론

희망의 시작 - 주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 (마태 22,1-14)

Author
kchung6767
Date
2017-10-14 07:45
Views
1373

연중 제 28주간 미사

2017년 10월 15일 일요일

주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 (마태 22,1-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 14)

오늘 복음에 니오는 혼인잔치의 비유는 바로 앞 부분의 두 개의 비유 즉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5)에서 이미 다루어진 신학적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첫째 부분은 나를 두고서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지금은 많이 고쳤지만 예전의 본인을 되돌아 보면, 하느님과 관계되는 일에는 너무나 소극적이며  귀찮아했었습니다. 그러했기에 하느님의 초대장을 받아 들고서는  그 초대를 거부할 수 있는 적당한 핑계꺼리를 찾았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 보면,  성당에 안나오는 이유를, 너무 바빠서, 또는 성당에 나오면 누가 보기 싫어서, 아니면 형식적으로 하는 미사 참례에 싫증을 느껴서 등등 여러 구실을 붙여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또 다른 초대장을 보내시는 대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는 내용이 담긴 경고장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기보다 뽑히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부분은, 이방인들,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 대한 초대입니다. 먼저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시간이 없고 바쁘다는 핑계로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자, 임금은 당신의 초대를 포기하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 거리의 사람들 맹인, 절름발이, 나병환자, 술주정뱅이, 귀머거리를 불러다가 잔치자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지만 실지로 선택받는 사람의 수는 소수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혼인 잔치에 참석한 이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불러 놓고,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가? 라고 책망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고,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지만, 초대받은 사람이 최소한의 예의, 즉 예복을 갖추지 않고 참석한다면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복이 무엇입니까? 많은 신학자들이 여러가지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해석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와 믿음보다 더 좋은 예복이 없습니다. 구원은 율법이나 선행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얼마나 큰 죄를 졌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격도 없는 인생이지만 영광의 자리에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복 을 단정하게 입었는지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선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주셨는데 이 핑계 저 핑계로 주일 미사를 빠지고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미사에 참석은 하고 있지만 잔치의 음식을 진정 하느님의 몸으로 믿고 감사드리고 있는지 반성해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시편 131편을 생각했습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을 두고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신의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자신의 눈은 높지 않고 자신은 거창한 것을 따라 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을 찾아 나서지도 않는다고 합니다(시편 131,1). 그러면서 자신은 어미 품에 안긴 젖뗀아기 같다(131, 2)고 말합니다.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어머니의 젖을 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이가 젖을 떼기 전에는 어머니를 찾을 때 젖 때문에 엄마의 품을 찾지만 젖을 뗀 아아가 엄마의 품을 찾는 것은 그 어머니의 품이 너무나 따뜻하고 품 안에서 참 평화와 행복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젖을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기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높이가 높지 않아야 합니다. 주제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게 합니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느끼는 행복과 평화를 거부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의 삶에서 떠나야 했던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일과 세상적인 일이 겹치게될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느님의 일을 놓습니다. 세상적인 일의 포기는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게하지만 하느님의 일의 포기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고 눈을 뜨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귀찮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포기하거나 냉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음으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예복을 잘 차려 입고자 합니다. 믿음과 회개의 삶을 실천하는 한 주간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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