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시작 - 참 행복의 조건(루카 14,15-24) - 3367
Author
신부님
Date
2024-10-31 00:53
Views
688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367
2024년 11월 5일 화요일
참 행복의 조건(루카 14,15-24)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루카 14, 15)
인간은누구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은 하느님께서 가져 가시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우리의 삶의 주인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물어 보십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를 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의 삶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파라오의 궁전에서 40년을 살았고 광야에서 40년을 목자로서 살았습니다. 이 80년의 삶이 현재의 자신의 삶이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 안에서 현재의 나는 과거의 삶의 총합입니다. 과거의 기쁘고 아팠던 모든 시간들이 합쳐져서 현재의 시간이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바라본 이 시간은 현재가 있게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가에 따라서 삶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4, 15-24)의 말씀은 14절에 이어서 15절에서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어떤 사람의 말로써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14절에서 예수님께서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불편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세의 행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희브리식 표현이라고 합니다.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 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게 될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이 말을 받아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는” 새로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상류층의 관습에 의하면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는 먼저, 초대를 한 후에 음식을 준비하고, 두 번째 음식 준비가 다 된 다음에 다시 초대를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잔치의 초대에 거절하려고 하면, 첫 번째 초대를 받았을 때 거절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음식이 다 준비된 이후에 초대를 받았을 때 거절하는 것은 큰 결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로운 비유를 말씀하시는 그 내용은 바로 두 번째의 초대를 거절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두 번째의 초대를 거절하는 이유들을 살펴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사실, 밭을 사기 전이면 밭을 보아야 하지만 그 밭을 사고 난 이후에 나가서 밭을 보아야 한다는 이유를 대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정말 밭을 보러 가야 한다고 해도 첫 번째의 초대에 응한 사람이 두 번째의 초대를 거절할 정도의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초대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세속적인 일 때문에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번 째의 사람은 자신이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을 부려 보려고 간다는 이유를 댑니다. 여기서 ’겨리’는 소 두 마리가 끄는 큰 쟁기이고 겨릿소는 겨리를 끄는 소입니다. 겨릿소 다섯 쌍을 샀다는 것은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두 번째 이유도 역시 타당성이 없습니다. 소들은 이미 샀고 그 소들을 부려 보아야 하는 일이 꼭 그날 그 시간에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물질적인 일을 핑계대면서 복음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 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자신이 방금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위의 두 사람이 양해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양해조차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거절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신명기에는 방금 장가를 든 사람의 경우에는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신명 24,5)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만일에 잔치와 결혼식이 같은 날로 겹쳤다면 첫 번째 초대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미리 밝혔어야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초대에 응할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참석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아예 초대를 무시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개인적인 쾌락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은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들이 스스로 거절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명예나 재산이나 권력 등등의 세상일에 대한 쓸데없는 애착과 집착 때 문에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위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는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특권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초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합당한 삶이 바로 그 초대에 응답인 것입니다.
나 자신을 들여다 봅니다. 나 역시 매 순간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초대을 거절한 순간이 참으로 많았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의 초대를 알면서도 스스로 유혹에 쓰러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러지는 자신을 합리화 시켰왔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거절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하느님의 초대의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면서도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원하는 것을 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외로운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미사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와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 느끼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024년 11월 5일 화요일
참 행복의 조건(루카 14,15-24)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루카 14, 15)
인간은누구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은 하느님께서 가져 가시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우리의 삶의 주인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물어 보십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를 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의 삶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파라오의 궁전에서 40년을 살았고 광야에서 40년을 목자로서 살았습니다. 이 80년의 삶이 현재의 자신의 삶이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 안에서 현재의 나는 과거의 삶의 총합입니다. 과거의 기쁘고 아팠던 모든 시간들이 합쳐져서 현재의 시간이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바라본 이 시간은 현재가 있게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가에 따라서 삶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4, 15-24)의 말씀은 14절에 이어서 15절에서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어떤 사람의 말로써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14절에서 예수님께서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불편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세의 행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희브리식 표현이라고 합니다.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 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게 될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이 말을 받아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는” 새로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상류층의 관습에 의하면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는 먼저, 초대를 한 후에 음식을 준비하고, 두 번째 음식 준비가 다 된 다음에 다시 초대를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잔치의 초대에 거절하려고 하면, 첫 번째 초대를 받았을 때 거절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음식이 다 준비된 이후에 초대를 받았을 때 거절하는 것은 큰 결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로운 비유를 말씀하시는 그 내용은 바로 두 번째의 초대를 거절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두 번째의 초대를 거절하는 이유들을 살펴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사실, 밭을 사기 전이면 밭을 보아야 하지만 그 밭을 사고 난 이후에 나가서 밭을 보아야 한다는 이유를 대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정말 밭을 보러 가야 한다고 해도 첫 번째의 초대에 응한 사람이 두 번째의 초대를 거절할 정도의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초대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세속적인 일 때문에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번 째의 사람은 자신이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을 부려 보려고 간다는 이유를 댑니다. 여기서 ’겨리’는 소 두 마리가 끄는 큰 쟁기이고 겨릿소는 겨리를 끄는 소입니다. 겨릿소 다섯 쌍을 샀다는 것은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두 번째 이유도 역시 타당성이 없습니다. 소들은 이미 샀고 그 소들을 부려 보아야 하는 일이 꼭 그날 그 시간에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물질적인 일을 핑계대면서 복음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 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자신이 방금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위의 두 사람이 양해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양해조차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거절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신명기에는 방금 장가를 든 사람의 경우에는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신명 24,5)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만일에 잔치와 결혼식이 같은 날로 겹쳤다면 첫 번째 초대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미리 밝혔어야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초대에 응할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참석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아예 초대를 무시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개인적인 쾌락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은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들이 스스로 거절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명예나 재산이나 권력 등등의 세상일에 대한 쓸데없는 애착과 집착 때 문에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위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는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특권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초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합당한 삶이 바로 그 초대에 응답인 것입니다.
나 자신을 들여다 봅니다. 나 역시 매 순간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초대을 거절한 순간이 참으로 많았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의 초대를 알면서도 스스로 유혹에 쓰러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러지는 자신을 합리화 시켰왔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거절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하느님의 초대의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면서도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원하는 것을 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외로운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미사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와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 느끼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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