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시작 -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슴을 믿느냐?(마태 9, 27-31) - 3394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394
2024년 12월 6일 금요일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슴을 믿느냐?(마태 9, 27-31)
“눈 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9, 27-28)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의 첫 구절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로 시작합니다. 이 시구는 삶의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강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꽃이 자라는 과정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때로는 폭풍을 겪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자연의 순리를 비유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 시구는 우리의 삶에서 불가피한 어려움과 시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고난들이 결국 우리를 더욱 성숙하고 강하게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삶의 풍파 속에서도 우리가 굳건히 살아가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어려운 상황을 겪지 않으면 진정한 성취나 아름다움을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주며, 우리가 겪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속에서 성장하고 피어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나약한 우리의 믿음은 이러한 흔들림의 과정을 통해서 더욱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흔들리는 이 순간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대면할 수 없는 우리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개인적인 일정 때문에 화상으로 하는 성경공부를 약 7주간을 쉬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시간이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함께하는 분들이 그립기도 했지만 말씀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말씀과의 만남을 지속할 수가 있어서 새로운 시작의 힘이 솟아 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고 다짐하면서도 의심의 씨앗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이 두 눈 먼 사람들에게 하셨던 질문을 저에게도 하심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의심 속의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눈 먼 두사람은 예수님의 질문에 명확하게 “예 주님!”하고 명확하게 대답합니다. 기적은 이러한 믿음의 고백에서 이루어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러한 일들이 젊을 때보다 조금은 쉬워지나 봅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신앙입니다. 믿음은 이러한 고백을 하는데 용기를 갖게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 좀 더 의탁하고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얻을 수도 있겠고 또 다른 한 방법은 내가 원하는 것을 줄여가면서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봄이고 하나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봄입니다. 그런데 훈련이 필요한 것은 후자의 것입니다. 내어 놓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소유함을 추구하는데 나홀로 외로이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포기하는 행복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부분에는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기적과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을 고치신 기적사화가 나옵니다. 이러한 소식들이 그 주변 지역에 퍼졌기 때문에 이 눈먼사람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서 찾아 왔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자신들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눈 먼사람들의 애절 함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눈을 뜨게할 수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을 의식하면서도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외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절박함에서 나오는 이 믿음이 바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하늘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사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 만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깨닫습니다. 약점이 많고 부족한 모습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로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아픔을 갖고 있는 우리, 영적인 아픔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존재론적인 의심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림절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이제는 병든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고 말씀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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