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용서와 자비에 대해서(마태 18,21-35) - 2305

Author
신부님
Date
2021-08-10 19:47
Views
943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2305

2021년 8월 12일 목요일

용서와 자비에 대해서(마태 18,21-35)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 33)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작은 존재이고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죄인이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우리를 용서하시고 무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나의 능력으로가 아닌 하느님의 사랑으로 된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이제 우리가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도 말씀이고 마침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그냥 말씀으로 남아 있어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입으로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구체적인 삶에서 이 말씀이 생명력을 가지고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서 이웃에게 보여지는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자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분으로 저에게 다가오십니다.

먼저 자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 때 당신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형식적으로 그냥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질을 말씀하십니다. 베풀어야 하니까 베푸는 형식적인 자비가 아닌 당신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처럼 자비를 능동적으로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자비여야 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이 말은 이 복음의 앞 부분에서는 하느님께서는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서 공동체의 하나된 마음을 중요시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잘못이 아닌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하는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나를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단순히 스승이나 교사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한과 권위를 지니신 분께 질문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명확하게 한계를 정하기를 원합니다.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 혹은 얼마만큼? 몇 번이나? 등등의 구체적인 한계를 정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의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하는 질문에 담긴 뜻을 살펴봅니다.

‘일곱 번을 용서해 주면 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는 성경에서 일곱의 의미는 ‘완전함’과 ‘꽉 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에 하느님께서도 일곱 번까지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일 곱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곱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다릅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 속에는 동시에 용서의 횟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용서가 중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 17장 3절에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하고 말합니다. 회개가 전제가 될 때 용서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회개’에 대한 조건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방이 회개하거나 안하거나 하는 것과 우리의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회개를 하고 용서를 받아들여 구원을 받거나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기를 거부하고 멸망하거나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이고, 용서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한정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용서를 하는 입장에서 용서의 태도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보면, ‘용서’란 바로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의 죄를 완전히 지워서 없애 주고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은 바로 예수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 함이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냥 말로써 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자비의 질처럼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지우고 잊는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그대로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심판의 기준은 바로 우리의 행동 그대로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때에 말씀하신 황금률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먼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체험하는 하루, 그 사랑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이웃이 나를 통해서 말씀을 체험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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