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소유와 비움의 천상적인 배합(마르 8, 34 - 9,1) - 2823

Author
신부님
Date
2023-02-15 20:51
Views
933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2823

2023년 2월 17일 금요일

소유와 비움의 천상적인 배합(마르 8, 34 - 9,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 1)

인간관계는 우리의 삶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깨어질 때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의 안연편에서  아래와 같이 믿음의 중요성 강조합니다.

어느날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방법을 묻습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합니다.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를 충실히 하며 백성으로 하여금 위정자를 믿게 하는 것이다.” 첫째가 식량, 둘째가 군대, 셋째가 백성들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질문을 합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버린다면 뭘 버리시겠습니까?” “군비를 버릴 것이다.” 자공이 다시 묻습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남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버린다면 뭘 버려야 되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답합니다. “먼저 먹을 것을 버릴 것이다. 예로부터 누구에게나 다 죽음은 있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설 수가 없다.”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 안보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군대와 식량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경제적인 안정이나 군대의 육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의 유대관계라고 주장합니다. 정신적 신뢰가 없으면, 물질적 토대는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국가 경영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 신뢰는 매우 소중 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인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인내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의 하나 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인내는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게합니다. 관계 안에서 지워지는 십자가와 나에 대해서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인내 중에서도 기다림의 인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의 이웃을 기댜려 주고 나를 기다려 주고 하느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 기다림은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의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인내인 것입니다.

개신교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로마서에 근거한 이러한 그들의 생각도 많이 변하고 있슴을 느낍니다. 야고버서를 받아들이기를 그렇게 싫어했던 그들이 야고버 사도가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믿음에는 실천이 함께해야 함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실천은 분리된 것이 아닌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이 깊은 사람은 자신의 삶도 그만큼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는 말씀은 믿음과 실천의 삶이 함께해야 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은 참으로 쉽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 들이면 됩니다. 그런데 받아들인다는 말의 뜻을 우리는 그냥 받아들이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 34-35)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는 삶을 살지 말고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람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이 어려운 말입니다. 무슨 의미일까 함께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본능적으로 세상의 친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출세와 부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의 논리가 바로 세상적인 출세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논리가 또 다른 ‘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나를 버리는 것이 바로 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탈피입니다. 서투른 것에로의 나아가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갈라티아 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 는 것입니다(갈라 2,20).”하고 말씀하십니다.

내안에서 ‘세상의 논리’가 살다가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입니다. 지금은 서투르지만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 익숙해 지는 삶입니다. 오로지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달리 표현하면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면 영적인 자아가 죽고 영적인 자아를 추구하면 세상적인 자아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자아를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데 이 영적인 자아를 추구하기 위해서 세상적인 자아를 버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 세상보다도 귀하고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내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나의 목숨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참 진리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원을 살기 위해서 세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적인 것의 포기가 모든 것의 포기가 아닌 필요한 만큼 가지고 나머지는 나누는 지혜인 것입니다.

가짐과 포기는 떨어진 단어가 아닌 함께가는 단어입니다. 소유와 비움의 천상적인 배합이 바로 참 평화와 행복의 길이며 영원을 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세상보다도 귀한 우리의 생명을 세상때문에 포기하는 어리석음으로 살지 않도록 오늘도 주님의 지혜를 청합니다.

‘내가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는 믿음을 실천하는데 이러한 삶을 가로 막는 나의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소들을 말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는데 그 자신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그냥 믿음만 갖고 살아가면 구원을 받을 터인데 왜 삶에서 실천까지 할려고 하느냐. 히고 유혹합니다. 이 유혹을 넘어서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변합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현장으로 갑니다. 이러한 변화된 삶은 바로 믿음의 실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유혹을 넘어서기 위해서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나를 버리는 것이 바로 나를 죽이는 것이고 나를 죽이는 것이 바로 영원을 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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