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박해 중에 받게될 네 번째 위로(마태 10,24 - 33) - 3260

Author
신부님
Date
2024-07-11 20:29
Views
795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260

2024년 7월 13일 토요일

박해 중에 받게될 네 번째 위로(마태 10,24 - 33)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 32-33)

요즈음 한국의 방송이나 신문을 보게 되면 아마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가짜뉴스’ 와 ‘팩트체크’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정치인들 입니다.  국민을 위한다고 입만 열면 외치는 정치인들이  만든 사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불신의 사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해서 알려 줍니다.

오늘 제 1 독서 이사야서 6장 1-8절은 이사야가 하느님의 영광을 보는 환시를 통해 자신의 죄와 불완전함을 깨닫고, 하느님의 정화와 용서를 경험하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영광, 그리고 그분 앞에서의 회개와 정화를 강조하며, 이사야가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특히 6장 2절은 하느님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간단하게 살펴보고 계속하고자 합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여기서 사랍들은 천사를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거룩함과 영광 앞에서 경외심과 겸손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너무나도 크고 영광스럽기 때문에 아무도 그분의 얼굴을 직접 뵐 수 없습니다. 스랍 천사들조차도 하느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의 경외심과 그분의 거룩함에 대한 존경을 상징합니다.

발을 가리는 이유는 고대 근동 문화에서는 발을 드러내는 것이 무례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더욱 그러하며,  천사들이 발을 가리는 것은 그분 앞에서의 겸손과 존경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는 자세를 상징합니다.

천사들이 얼굴과 발을 가리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경외하며 그분 앞에서의 겸손과 존경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의 경외심, 겸손함, 그리고 그분의 무한한 거룩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사야서 6장 2절에서 묘사된 이 장면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강조하며, 이사야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불완전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배경을 제공합니다.

오늘 복음의 전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선교의 현장에 가게 되면 박해를 받게될 것이라는 말씀과 그러한 박해에 직면해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러한 박해 중에 받게될 위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박해 중에 받게될 세가지의 위로에 이어서  오늘  네번째 받게될 위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제자와 스승’ 그리고 ‘종과 주인’이라는 비유를 쓰실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며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신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종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종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인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선 우리는 종이기도 하고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당신 앞에선 모든 존재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그냥 제자이며 종이라는 생각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인간들 사이에는 하느님 앞에서  ‘똑같음’의 관계가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서로가 자신을 높이고 지배하려 듭니다. 구별하려 합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똑 같음’을 부정했습니다. 이러한 높고 낮음의 구분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았기에 원래의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인간을 보아야 함에도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우선이되고 하느님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기억합니다. 이들은 하느님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영역에는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슴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유혹에 빠집니다.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이 이를 깨닫게 합니다.

“사람들이 집 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여기서 ‘집 주인’은 예수님을 말하고  ‘집’은 교회를 말하며  ‘그 집 식들’은 제자들과 신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9장 34절의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는 말씀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마귀의 우두머리로 생각하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심하게 박해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박해를 이겨내면 우리는 바로 스승처럼 되고 주인처럼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박해를 견디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네 번째의 위로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 둘러보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방해요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들을 이겨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기에 그 길이 바른 길처럼 여겨집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리는 것은 죄가 아닌것처럼 생각됩니다.

대세를 거스르기가 너무나 힘이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가짜뉴스가 판을 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대세인 것처럼 보여도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나 달콤함에 빠지기 보다는 겉은 형편없지만 내적인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 바로 대세를 거스르는 일인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힘든 일이지만 이러한 힘든 일을 이겨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이러한 노력과 희생을 증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의 상황이 어렵다고해서 믿음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그 믿음 속 에서 더욱 대담해져야 하고 용감해져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간절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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