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단죄의 법에서 사랑의 법으로(마르 3, 1-6) - 2797

Author
신부님
Date
2023-01-16 20:25
Views
997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2797

2023년 1월 18일 수요일

단죄의 법에서 사랑의 법으로(마르 3, 1-6)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 4)

사랑의 법은 모든 판단의 기준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가에 있습니다. 이 사랑의 법은 기준이 하느님의 뜻에 있기에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갖고 있었던 율법이 사랑의 법에서 단죄의 법으로 바뀌게 된 이면에는 본질은 없고 형식만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응급상황에 처한 사람을 치유하는데는 안식일의 규정이나 율법 같은 것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 우선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중심의 사회에서는 사랑이 최고의 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위한 법이 인간을 규제하는 법으로 바뀌어 가는 현실을 보면서 원래의 창조의 정신으로 돌아가 함을 느낍니다.

 ‘고백하는 사람’과 ‘고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발하는데 익숙합니다.

오늘 복음은 고발하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냥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루카복음을 보면, 이 사람들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해가 더욱 쉬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던 사람들입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서 치밀하게 준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정교한 언어와 설득력이 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미움과 증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논리정연하고 교묘한 언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눌하고 투박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웃을 배려하는 사랑과 자신을 고백하는 겸손함이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은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일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의 2절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데려왔을 가능성이 더 많아 보입니다.

이미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고 밀이삭을 뜯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의 규졍을 지키지 않습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비판에 대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 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 27)  하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 5)하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안식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한을 받아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이제는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 당신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기득권을 가진 자는 항상 법 앞에서도 강자이며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은 언제나 법 앞에서도 약자입니다. 이를 되돌려 놓으려는 예수님의 행동이 당시의 기득권자들에게는 눈의 가시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 것인가를 구실을 찾던 사람들이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회당으로 데려와서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 고발하기 위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율법규정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이날을 더럽히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이날에 일을 하는 자는 누구나 제 백성 가운데에서 잘려나갈 것이다(탈출 31, 14)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예수님을 지켜보는 이유는 이 규정을 어기면 죽이겠다는 의도가 있슴을 알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사람들이 잘보이는 가운데로 나와서 서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 9)  하고 질문을 하십니다. 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반박할 수가 없어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손을 고쳐주시는 기적으로 당신의 질문에 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갖고 있었던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에 대한 적용기준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노동에 해당되는가, 아닌가? 가 안식일을 지키는 기준이 아니라, 그 일이 착한 일인가, 아닌가? 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은 마음을 갖고 살아가면,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합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혹은 나 자신을 통해서도 이러한 체험을 합니다.  남을 탓하기 이전에 나의 굳은 마음을 봅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이 굳은 마음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께서 슬퍼하시는 일이 생기지 않는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발하는 사람보다는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율법이나 규정의 노예가 아닌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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