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시작 - 거룩한 수동태의 삶 (마태 19, 3 - 12) - 3288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288
2024년 8월 16일 금요일
거룩한 수동태의 삶 (마태 19, 3 - 12)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3-12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바오로 사도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히 로마 1, 1절은 저에게 참으로 많은 묵상거리를 주었습니다. 이절을 인용해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로마 1,1).
이 절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예수님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그리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비오로” 라고 소개 합니다. 여기서 저의 시선이 머문곳은 바로 ‘받고’와 선택을 받은’ 이라는 말의 동사형입니다. 이 수동형의 동사가 저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의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여태까지 생소했던 이혼과 재혼이라는 단어가 일반화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배성사의 성혼 서약서의 내용이 너무나 쉽게 깨어지고 있슴을 실감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혼배성사의 참된의미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보면서 질문에 담겨진 의도를 보게됩니다.. 이러한 의도적인 질문을 우리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의 전형적인 모형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과 사단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면서 살아가도록 초대를 하십니다. 선과 악에 대한 단호한 입장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분명한 태도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한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로 돌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총이 필요합니다.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서서 우리에게 중간의 길은 없습니다. ‘선’ 아니면 ‘아니오’하고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의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반면에 ‘악’의 길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길입니다. 세상에서 의롭게 ‘선’을 선택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적인 외로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노아가 그가 살아가던 그 시기에 의롭고 흠없는 삶을 살아간 사람이라고 성경은 전합니다. 간단하게 그의 삶을 표현하고 있지만 조금만 주의를 갖고서 묵상해 보면, 그의 삶이 얼마나 힘들과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은 세상의 추세를 거슬러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추세를 거슬러 살아갈 수 있는 힘은 하느님의 사랑의 체험에서 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남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면서 어려운 시기를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어려움의 종류와 질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이 어려움을 남과 비교해서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이에게는 객관적으로 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참으로 심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기는 당연히 암보다는 가벼운 병일 뿐만 아니라 고통도 덜합니다. 하지만 이를 견디는 사람에 따라서 오히려 감기에 걸린 사람이 암에 걸린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의 불이해와 공동체에서의 소외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여러분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당할 때 끝까지 현명하게 이러한 어려움을 잘 견뎌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도에 포기하고픈 유혹이 생겨도 잘 참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하느님 안에서 이러한 유혹을 이겨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야고 5,11)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과 하느님 때문에 ‘노’라고 대답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응답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식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 하느님을 두고서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식이나 정보에 의한 선택은 결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 아니면 “아니오”의 결단입니다. 그래서 야고버 사도는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야고 5,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인이 되는 거룩한 수동태의 삶이 올바른 결단을 하게 해 줄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결혼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을 항구하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비율이 점점 줄어듭니다. 이유는 사랑에 의한 결혼보다는 조건에 의한 결혼이 더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건에 의한 결혼은 조건의 사라짐에 따라서 사랑도 사라질 것입니다.
최근에는 더욱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조건이 사랑에 우선하는 결혼이 더 많아졌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의 결혼이 아닌 도구적인 만남의 결혼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이 사랑의 결합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의 전형을 따르는 사랑의 실천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상대를 위해서 내어놓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결혼을 더욱 알차고 충만하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순간 순간 다가오는 인간적인 유혹도 극복하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결혼의 본질과 이혼의 문제,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불러주셨슴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수동태의 삶을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Number | Title | Author | Date | Votes | Views |
2747 |
New 희망의 시작 -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인가(루카 6, 6-11) - 3308
신부님
|
2024.09.07
|
Votes 1
|
Views 76
|
신부님 | 2024.09.07 | 1 | 76 |
2746 |
New 희망의 시작 - 안식일의 참의미 (루카 6,1-5) - 3307
신부님
|
2024.09.05
|
Votes 6
|
Views 387
|
신부님 | 2024.09.05 | 6 | 387 |
2745 |
New 희망의 시작 -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는 삶(루카 5,33-39} - 3306
신부님
|
2024.09.04
|
Votes 4
|
Views 424
|
신부님 | 2024.09.04 | 4 | 424 |
2744 |
New 희망의 시작 - 똑 같은 사건의 상반된 의미(루카 5,1-11) - 3305
신부님
|
2024.09.03
|
Votes 5
|
Views 431
|
신부님 | 2024.09.03 | 5 | 431 |
2743 |
희망의 시작 -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 (루카 4, 38-44) - 3304
신부님
|
2024.09.02
|
Votes 4
|
Views 417
|
신부님 | 2024.09.02 | 4 | 417 |
2742 |
희망의 시작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루카 4,31-37) -3303
신부님
|
2024.09.01
|
Votes 6
|
Views 428
|
신부님 | 2024.09.01 | 6 | 428 |
2741 |
희망의 시작 - 존재의 근거이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루카 4, 16- 30) - 3302
신부님
|
2024.08.31
|
Votes 3
|
Views 503
|
신부님 | 2024.08.31 | 3 | 503 |
2740 |
희망의 시작 - 혐오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모습(마태 25, 14-30) - 3301
신부님
|
2024.08.29
|
Votes 5
|
Views 534
|
신부님 | 2024.08.29 | 5 | 534 |
2739 |
희망의 시작 - 내일로 미루지 않는 삶 (마태 25, 1-13) - 3300
신부님
|
2024.08.29
|
Votes 6
|
Views 595
|
신부님 | 2024.08.29 | 6 | 595 |
2738 |
희망의 시작 -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마르 6, 17-29) - 3299
신부님
|
2024.08.27
|
Votes 6
|
Views 529
|
신부님 | 2024.08.27 | 6 | 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