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성녀 아그네서 동정 순교자 기념일(1사무 17,32-33.37.40-51 / 마르 3,1-6) - 3841

Author
신부님
Date
2026-01-19 05:41
Views
322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841

2026년 1월 21일 수요일

성녀 아그네서 동정 순교자 기념일(1사무 17,32-33.37.40-51 / 마르 3,1-6)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오늘은 성녀 아그네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녀 아그네스는 아주 어린 나이에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동정 순교자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약한 소녀”였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힘은 상대를 꺾는 폭력에서 나오지 않았고,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온유함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칼과 위협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려 하지만, 성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조용했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던 그 선택은, 오늘 우리에게. 부드러움은 물러섬이 아니라, 하느님께 뿌리내린 용기라고 알려 줍니다.

오늘 제1독서(1사무 17,32-33.37.40-51)에서 소년 다윗은 사울 임금이 입혀준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벗어 던집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유일한 방어 수단을 내려놓는 일처럼 보이지만, 다윗에게는 오히려 주님의 능력을 가리는 장애물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위협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갑옷”을 찾습니다. 더 단단한 논리, 더 센 말, 더 확실한 규칙, 더 안전한 울타리. 마음이 불안할수록 사람은 무거운 것을 껴입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일은 종종 그 반대로 진행됩니다.

더 강한 갑옷이 아니라, 불필요한 갑옷을 벗는 자유에서 시작됩니다. 다윗은 갑옷 대신 시냇가로 내려가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습니다. ‘매끄럽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날카롭지 않고 거칠지 않아, 손에 상처를 내지 않습니다. 믿음의 무기는 사람을 찢는 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윗의 손이 먼저 보여 줍니다.

거구 골리앗은 칼과 창이라는 ‘강함’으로 무장했지만, 다윗은 하느님을 향한 신뢰라는 ‘부드러움’으로 맞섭니다.

다윗의 돌은 기술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손에 잡힌 형태로 바뀌어, 마침내 거인의 이마를 꿰뚫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은 다윗의 체격이 아니라, 다윗이 붙들고 있던 하느님의 이름과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마르 3,1-6)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회당 안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마르 3,2).

율법학자들은 안식일 법규라는 딱딱한 칼날을 세워 주님을 공격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칼날을 더 깊은 자리로 밀어 넣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마르 3,4 참조)

안식일의 목적은 규정의 승리가 아니라 생명의 회복입니다. 하느님께서 쉬신 날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다시 살아 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규정이 생명을 누른다면, 그 규정은 본래 목적을 배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온유함은 어정쩡한 타협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향한 하느님의 권위입니다. 사랑은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는 척할 수는 있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느리게 가는 듯해도 끝내 생명을 일으켜 세웁니다.

성녀 아그네스의 순교는 바로 이 복음의 논리를 한 사람의 삶으로 증명한 사건입니다. 그녀는 세상의 폭력 앞에서 폭력으로 답하지 않았고, 조롱 앞에서 조롱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든 무기는 칼이 아니라 동정의 정결함과 사랑의 충실함이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약함이라 불렀지만, 하늘은 그것을 강함이라 부릅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 온유함은 꺾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자 『도덕경』이 말하듯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에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물은 칼이 아니지만 바위를 깎습니다. 성녀 아그네스의 사랑도 그랬습니다. 세상은 그녀를 꺾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녀의 사랑이 세상의 폭력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사랑은 패배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결국 사랑만이 남습니다.

우리는 쉽게 거칠어지는 시대를 삽니다. 대화는 토론이 아니라 전투가 되고, 공동체는 품이 아니라 진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더 빨리 판단하고, 더 쉽게 낙인찍고, 더 강한 말로 상대를 눌러 이기려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신을 지키겠다고 더 무거운 갑옷을 껴입습니다. 그런데 갑옷이 두꺼워질수록 서로에게 닿는 모든 접촉이 상처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물으십니다. “그 갑옷이 정말 필요한가? 그 확신이 혹시 사랑을 죽이고 있지는 않은가?”

안셀름 그륀 신부님이 말하듯, 온유함은 약자의 자기최면이 아니라 하느님께 뿌리내린 사람의 내면의 힘입니다. 내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단단해질수록, 나는 굳이 큰소리로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상대를 적으로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가 입고 있는  “내가 옳다”는 갑옷, “내 방식만 맞다”는 갑옷, “상처받기 싫다”는 갑옷, 또는 ‘규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밀어내는 갑옷 등을 벗어 버립시다. 그리고 손에 ‘매끄러운 돌 하나’를 쥡시다. 먼저 사과하는 돌, 먼저 안부를 묻는 돌, 먼저 듣는 돌, 오늘 누군가를 위해 작은 희생을 선택하는 돌.

우리의 돌멩이는 누군가를 해치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하신 일은 규정 위반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 회복이었듯이, 우리의 작은 선택들도 누군가의 손을 펴 주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성녀 아그네스의 기념일에 지내면서 기도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갑옷을 벗을 수 있는 자유를 주소서. 강해 보이려다 거칠어지는 마음을 당신의 온유로 다스리게 하소서. 내 안의 완고함과 고정관념이라는 골리앗을 당신의 부드러운 사랑으로 무너뜨리게 하소서. 제 손에 들린 돌멩이가 누군가를 해치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일구는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성녀 아그네스가 그러했듯, 부드러움으로 굳셈을 이기시는 당신의 방식이 오늘 제 삶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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