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사 7,10-14; 히브 10,4-10; 루카 1,26-38) - 3895

Author
신부님
Date
2026-03-23 12:15
Views
362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895

2026년 3월 25일 수요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사 7,10-14; 히브 10,4-10; 루카 1,26-3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우리는 종종 삶의 의미를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에서 찾으려 합니다. 더 많은 성취와 더 큰 결과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마음은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조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마음, 그 비움과 순명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깊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녀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분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협력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라고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순명은 신앙의 가장 높은 형태이며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이 두분의 말씀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의 핵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인간의 위대한 업적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젊은 여인의 조용한 응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이 짧은 말 속에서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마음을 비워 드린 그 순간,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제1독서(이사 7,10-14)에서 우리는 아하즈 임금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징표를 청하라”(이사 7,11)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저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이사 7,12)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경건하고 겸손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가 아니라 인간적인 계산과 두려움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보다 정치적 동맹과 인간적인 방법을 더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신 때문에 당신의 구원 계획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분명한 징표를 주십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등을 돌려도 하느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하즈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일상과도 닮아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보다 자신의 계산과 계획을 더 믿고 싶어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불완전함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흔들려도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 10,4-10)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죄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히브 10,4). 하느님께서 바라신 것은 제물의 피가 아니라 순명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이 말씀(루카 1,26-38) 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기꺼이 실현하려는 사랑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이 순명은 바로 성모 마리아의 “예”에서 시작된 역사였습니다. 마리아의 응답이 없었다면 강생의 역사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순명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26-38)은 그 순간을 매우 조용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인사합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루카 1,28) 마리아는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 이렇게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한 문장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동의의 말이었습니다. 이 구절의 그리스어 표현은 더욱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은 γένοιτό μοι(게노이토 모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소극적인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내 삶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능동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마리아의 응답은 체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자신을 열어 드리는 용기 있는 신앙의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계획을 움켜쥐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마음의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하즈처럼 겉으로만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마리아처럼 두려움 속에서도 “예”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신앙의 완성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성모님의 “피아트(Fiat)”, 곧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루카 1,38)라는 고백이 우리 마음 안에서도 다시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조용히 고백해 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이 짧은 기도 속에서 우리의 하루도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로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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