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시작 - 혐오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모습(마태 25, 14-30) - 3301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301
2024년 8월 31일 토요일
혐오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모습(마태 25, 14-30)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0)
착하고 성실한 종이 잘 사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일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기 보다는 이를 덮기 위해서 오히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이나 정치지향적인 종교인들이나 일부 사회지도 계층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회가 참으로 서로 신뢰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성실하며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말과 행동이 바뀌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심각하게 양분되어 있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서 말과 행동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고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주인이 언제 올 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세사람에게 그들의 능력에 맡게 탈렌트를 맡기고 떠났다가 돌아와서 셈을 합니다.
이 세 종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탈렌트를 활용해서 그 결과를 주인에게 보고를 합니다. 이들의 다양한 태도를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십니다.
첫 번째의 종과 두 번째의 종은 주인의 명령을 듣고 잘 실천합니다. 그래서 이 둘은 주인으로부터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종은 주인이 준 금화를 보관하기만 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 줍니다. 그러면서 이 종은 주인에게 주인이 냉혹한 사람이어서 두려웠다고 말합니다(마태 25, 24).
여기서 세 번째 종의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주인은 당신의 종들이 자신이 준 금화로 많은 벌이를 하는 것에 목적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이들의 성실성 만을 보고자 했고 성실하게 노력한 종들에게는 그러한 성실성에 합당한 책임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세번 째의 종은 자신이 그 금화로 벌이를 했다가 손해를 보면 주인에게 벌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원금이라도 안전하게 보관을 해 두자’라는 생각으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번째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주인의 명령을 실천할 의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의 이면에는 이러한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둘째는, 주인의 명령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세째는, 그렇더라도 주인을 위해서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생각한 것. 그리고 네째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등입니다.
주인은 세 번째 종의 능력이 없슴을 꾸짖지 않고 그의 ‘불성실’을 꾸짖습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성실함이란 종들이 자신의 명령에 순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주인으로 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최선을 다해서 주인의 명령에 따르고자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의 종이 설사 자신의 무능함으로 주인의 명령에 따라 성실하게 노력을 했다가 원금마저 잃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주인은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이고 종들은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말할 것입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승천을 그리고 다시 돌아온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오심 즉 재림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이 종들과 셈을 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당신의 종들 즉 우리들을 심판하실 때에는 우리가 쌓아온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당신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 왔느냐를 보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성실함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결과보다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성실함이 인정받는 나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금으로 된 잔이 아니라 금으로 된 영혼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저 부터 하느님 안에서 성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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