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하늘나라의 출발점은 잘 들음에 있다(마태 11,11-15) - 3399

Author
신부님
Date
2024-12-10 18:45
Views
710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399

2024년 12월 12일 목요일

하늘나라의 출발점은 잘 들음에 있다(마태 11,11-15)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 12)

작금의 우리 사회는 주장만 있지 들음은 없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최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사회적인 불안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잘 듣는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 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관계 안에서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중요성을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41장 14절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에서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연약함과 처지를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은 비유적이고 겸손을 나타내며,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의 절박함과 그들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벌레"와 "구더기"는 작은 존재로, 자연에서 별다른 힘이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생명력도 약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외적인 힘이나 자랑할 만한 무엇도 없고, 세상에서 보기에 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나타내시고자 이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이 그 당시 다른 강국들에 비해 군사력이나 경제력 면에서 매우 연약하고 불리한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능력이나 자원에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벌레"처럼 연약하고 구더기처럼 힘이 없더라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실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벌레 같은" 표현은 단순히 연약함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실 필요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연약한 존재를 돌보시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힘을 낼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고 도울 수 있는 전능한 분이시라는 믿음을 심어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없이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분의 능력과 구원에 의지해야 함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처한 연약한 상황을 아시고, 그들을 돌보시겠다는 약속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인하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이심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던 당시의 사람들은 제자들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7, 3) 하고 묻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7, 6)는 예수님의 답변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이들이 의심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를 염려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의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소개해 주십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들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었던 ‘군중’들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을 만나기 위해서 광야로 갔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11, 7)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하에 오늘의 복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다른 예언 자들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성경 말라키서 3장 1절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은 당신은 메시아이고,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준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메시아를 준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하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는 이 말씀은 비록 세례자 요한이 구약의 사람들 가운데서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고 예언자 이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더 큰 은헤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이 준비하는 이 하늘나라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완성으로 나아가는 이 하늘나라는 과정에서 많은 우려곡절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 12)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전하는 하늘나라의 복음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 특히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와 같은 권위자들로부터 큰 저항을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그를 적대시하며, 심지어 예수님을 죽일려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당시 사회적, 종교적 질서와 충돌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하늘나라가 폭력적 저항을 받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 구절에서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는 말은 하늘나라는 쉽게 다가갈 수 없고, 세상의 권력과 반대 세력의 저항이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나라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은 그 믿음과 결단을 통해 하늘나라를 '빼앗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손을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때로는 어려움과 역경을 견뎌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늘나라에 대한 폭력은 그 당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부정과 불의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모든 이기적인 행위들, 등등 부정적인 요소들이 이러한 폭력들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외부에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 안에도 존재합니다.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오늘 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오고 있는지 반성하도록 초대합니다. 귀가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눈이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어쩌면 듣지도 보지도 않으려고 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듣고 본다면 실천이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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