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시작 - 비참한 인간과 주님의 자비(다니 13,41ㄹ-62/요한 8,1-11)-3893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3893
2026년 3월 23일 월요일
비참한 인간과 주님의 자비(다니 13,41ㄹ-62/요한 8,1-11)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11)
이른 아침, 성전 뜰에 감도는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동이 터 옵니다. 그 고요한 시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지요.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한 여인을 끌고 와 군중 한가운데 세우며 그 평화는 일순간에 깨어집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다"는 여인을 향한 사람들의 눈빛은 서슬 퍼런 칼날과 같습니다. 그들의 손에 당장 돌이 들려 있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미 마음속에는 '단죄'라는 이름의 묵직한 돌들이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8,1-11)은 인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비극적인 한 장면입니다. 누군가는 심판의 돌을 들고 있고, 누군가는 그 돌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 있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살벌한 대립의 한복판에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인간은 타인의 허물을 찾아내는 데 본능적으로 익숙합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들춰낼 때 묘한 안도감과 우월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추락을 확인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조금 더 의로운 사람처럼 느껴지는 위선, 그것이 우리 마음속 어두운 본성입니다.
제1독서인 수산나 이야기(다니 13,41ㄹ-62)는 이러한 인간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공동체의 존경을 받던 두 원로는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감추기 위해 무죄한 수산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합니다.
그들은 "그 여자가 나무 아래에서 한 젊은이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헤오라카멘(ἑωράκαμεν)'은 단순히 눈에 담았다는 뜻을 넘어 "확실히 보았기에 증언할 수 있다"는 강력한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해 그들의 거짓 권위를 무너뜨리십니다. "어떤 나무 아래서 보았느냐"는 다니엘의 촌철살인 같은 질문에 위선자들의 성벽은 무너지고, 죽음의 문턱에 섰던 수산나는 구원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법과 정의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욕망과 왜곡이 숨어 있을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복음 속 바리사이들 역시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한다"며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소란에 휘말리는 대신 조용히 몸을 굽혀 땅에 글을 쓰십니다. 그리고 침묵 끝에 던지신 한마디는 인류의 양심을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되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죄 없는 자'는 그리스어로 '아나마르테토스(ἀναμάρτητος)'입니다. 이는 단순히 죄가 적은 상태가 아니라, 단 한 번도 과녁을 벗어난 적 없는 완전한 무결함을 의미합니다. 이 선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떠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엑세르콘토'는 단순한 퇴장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스스로 물러나는 내면의 항복을 의미합니다.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성전 뜰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대로 "비참한 인간과 자비(Misera et Misericordia)"만이 마주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물으신 뒤,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11)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법적으로 파멸시키는 '단죄(κατακρίνω)'를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삶이 다시는 과녁을 빗나가는 '죄(ἁμαρτάνω)'에 머물지 않도록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주님의 자비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방종이 아니라, 죄인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강력한 창조적 힘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먼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돌을 손에 쥔 채 살아갑니다. 누군가의 실수를 목격했을 때, 누군가의 약점을 알게 되었을 때, 혹은 그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마음속에서 돌을 쥡니다. 오늘날의 돌은 더 날카롭고 잔인합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자극적인 댓글 하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한 사람의 영혼을 난도질합니다.
법구경은 말합니다. "남의 잘못을 보기는 쉽지만 자기 잘못을 보기는 어렵다"고 말입니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 역시 "모든 성인에게는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통찰을 남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부끄러운 과거에 함몰되지 않으시고, 그녀가 걸어갈 눈부신 미래를 바라보셨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지금 누구를 향해 돌을 겨누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혹은 여전히 과거의 죄책감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스스로를 돌로 치고 있지는 않는지 질문을 해 봅니다.
이제 그 무거운 돌을 내려놓아야 할 시간입니다. 손에 쥔 돌을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빈손으로 주님의 자비로운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돌을 내려놓는 그 빈자리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비가 시작되며, 우리의 삶 또한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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