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론

희망의 시작 - 성령강림 대축일에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요한 20, 19 - 23)

Author
kchung6767
Date
2018-05-19 14:54
Views
1158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

2018년 5월 20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요한 20, 19 - 23)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

오늘은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머물러 있던 하느님의 사랑이 이제는 이 세상 끝까지 확장되어 갑니다.  바로 오늘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합니다. 성령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나는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합니다.

좋은 배우자를 얻기 위한기도를 바치던 사람에서 좋은 배우자가 되기 위한 사람으로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나 중심의 사랑에서 하느님과 이웃이 중심이 되는 사랑의 삶의 모습으로 바뀌는 사랑의 중심에는 바로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성령강림 축일을 맞을 때마다 하느님께 나의 희망이 되어주시도록 청하던 삶에서 나도 하느님의 희망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왔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나에게로 수렴시키던 하느님의 사랑을  확산시키는 사랑으로 바꾸어 갈려고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 나의 모습은,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하는 질문을 해 봅니다.  이 질문에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 성령의 교회,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붙잡힌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 성령께서 마음껏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간절히 원하시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주간 첫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이라함은 주일 저녁을 말합니다. 이 때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잠가 놓고 있었답니다. 이들이 왜 유다인들을 두려워했는지를 우리는 잘압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했던 유다인들이 그를 추종했던 자신들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문을 잠가 놓았다.’라는 것은 참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이렇게 문을 잠가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 기도 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당연히 두렵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그들 중간에 서셔서 말씀하시기를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십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반대어인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란 세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불안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함에서 오는 두려움이고 불안이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이‘평화’는 세상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어떠한 세상적인 것도, 재물이나 권력돠 명예도 침범할 수 없는 ‘평화’인 것입니다. 쥐는 것에서 오는 ‘평화’가 아닌 내어놓음에서 오는 ‘평화’인 것입니다.  이 ‘평화’는 파견과 함께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시면서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동시에 이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숨은 생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숨’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새롭게 거듭남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의 대화에서 ‘거듭남’에 대해서 강조를 하셨는데 이 ‘거듭남’이 바로 위로부터 태어남을 말합니다. 즉 이말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말합니다. 이렇게 당신의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평화를 누리는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당신의 제자들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이들의 사명은 ‘용서’를 위한 파견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던 120여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림하시는 것을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 봅니다. 성령이 충만한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머물던 곳에서 떠나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세상적인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합니다. 숨어있어야만 했던 우리가 이제는 삶의 현장으로 과감하게 뛰어들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기뻐하고 쉼없이 기도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소유의 사랑에서 나눔과 확산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가고자 다짐합니다. 우리를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하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성령님께 마음을 열고 다가 가고자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희망이 되는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한 주간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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