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희망의 시작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마르 3, 31-35) - 2802

Author
신부님
Date
2023-01-22 22:26
Views
506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묵상 - 2802

2023년 1월 24일 화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마르 3, 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5)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와 살레시오회 회원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전세계에서 관계의 벽을 가장 잘 쌓는 나라가 우리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벽은 열린 벽이 아닌 배타적인 닫힌 벽입니다. 어지간한 노력으로 깨기 힘든 단단한 벽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벽은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쌓여져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동서의 벽은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동서의 벽은 지역감정으로 그리고 이 감정은 이제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인 색깔로 덧 씌워져 있습니다.  얼마전 신문에서 진보와 보수로 극명하게 나누어진 우리 사회의 일단을 보여주는 기사를 읽고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한국에서는 90프로의 국민 중에서 이념이 다른 사람과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벽을 어떻게 넘어 설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이 미쳤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서 당신을 잡기 위해서 찾아온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십니다. 참으로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당신의 가족관계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루카 9, 62)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평화를 주러 온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다(마태 10, 34)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당신께서는 어떠한 특정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고 통치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장소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장소라면 어느 곳이든 그곳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함께하고 계시는 이 땅에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결혼하는 일도 없고 형제자매의 육적인 관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로 당신의  주변에서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이 사람들이 바로 당신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적인 관계의 가족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혈연적인 관계를 바라보게 될 때 배타적인 관계의 개념이 열려진 관계의 개념으로 바뀔 수가 있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 주위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시는 것(요한 19, 26-27)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에 우선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랑은 대립적인 관계의 사랑이 아닌 차원이 다른 사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이나 세상적인 것들을 두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함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곁들여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마태 6, 31-33).  이러한 믿음의 실천이 혈연적인 배타적인  형제의 틀에 매여 있는 우리를 하느님 안에서의 열려진 형제적인 개념에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새로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새 것이라는 의미로 그리스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간적 의미에서의 새로움은 네오스입니다. 시간이 가고 새로운 시간이 오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가면서 오는 새로운 시간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질적인 새로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카이노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카이노스의 인간관계를 말합니다. 혈연적인 배타적인 관계에서 하느님 안에서 열린 인간관계에로의 변화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코린토 후서 5장 17절의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하는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이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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