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론

연중 제 26주간 - 죄를 이기는 삶 (9,38-43.45.47-48)

Author
신부님
Date
2021-09-24 21:42
Views
687

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2021년 9월 26일 일요일

죄를 이기는 삶 (9,38-43.45.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 40)

지금의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참으로 차가운 겨울입니다. 온기라고는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습니다.코로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기간이라 더더욱그런가 봅니다.정치의 계절이라 더욱 그러한가 봅니다. 

우연히 한국의 두 정당에서 하고 있는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를 잠시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보다가 중간에 채널을 돌리기는 했지만 인간의 욕심이 전제된 토론이기에 정책보다는 전략이 상호인정 보다는 깍아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사람들이 이러한 경선이 끝나고 나면 어떠한 모습으로 경쟁후보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판단할 때 이분법적인 논리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폐쇄적인 눈과 사고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열려진 생각과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함을 깨우져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흑과 백만 있는 것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와의 생각이 다르면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나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지도 않고 또한 공동체에 속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있었슴을 오늘 복음은 알려줍니다.

요한이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슴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혈질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 만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에 속하지도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 그들이 그런일을 하지 못하도록 요한이 막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에수님께 자신의 일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이나 사도 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공동체 속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도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해서 마귀를 쫓아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만약에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다면 쫓겨난 마귀는 그 사람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께 순명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 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비록 그 사람이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행위 속에 담겨진 뜻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권위와 힘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사도들과 같은 신앙은 없더라도 예수님을 통해 행사되는 하느님의 능력은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킨다면, 즉 마귀가 쫓겨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의 믿음은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가 신앙을 갖거나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적어도 예수님을 나쁘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분명하게 당신을 적이라고 선언하지 않는 모든  모든 사람은 동조자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는 열려진 사고를 갖고 계심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러한 열린 생각을 갖고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갖고서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우리' 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을 구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신의 생각이 당연히 우리의 생각이어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당신을 믿고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사형시키는 형벌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사용하던 사형 방법 중의 하나였는데 유대인들은 이 형벌을 주검을 땅에 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 형보다 더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의 벌의 엄중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은 큰 죄이고 이 죄에 대한 벌도 무섭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눈과 그리고 우리의 눈이 죄를 짓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예로서 우리의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한다면 잘라버려야  하고 눈이 죄를 짓게 한다면  그것을 빼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같은 내용을 표현만 바꾸어서 43, 45, 47절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은 이 가르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괄호에 44, 46의 번호만 나오고 성경의 구절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구절들은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8절의 말의 반복입니다.  이 구절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나를 거역하던 자들의 주검을 보리라. 정녕 그들의 구더기들은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한 채 모든 사람들에게 역겨움이 되리라.” (이사야서 66, 24)에서 가져 온 표현인데, 악인들이 받을 영원한 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주요 필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성경의 본문으로는 인정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번호로만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리스어로 ‘게헨나'를 말하는데 , 이 말은 원래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벤 힌놈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기원전 622년 유다 왕 요시아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곳에서 '몰렉'이 라는 이름의 신에게 어린이들을 제물로 불살라 바쳤는데, 요시아 왕이 그런 짓을 못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우상 신에게 제물로 바친 일 때문에 그곳은 '저주받은 골짜기'가 되었고, 나중에는 종말에 죄인들이 갈 곳(지옥)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는데  '지옥 불'에 대한 표현도 거기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불과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불은 불순물을 태우고, 소금은 썪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49)는  말씀은  '종말에 앞서 모두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인 사랑을 소금으로 비유한다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어 버리는 것이 바로 소금이 짠 맛을 잃어 버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죄의 유혹을 이겨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죄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죄를 안짓겠다는 소극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죄를 지을 기회를 없애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소금의 짠맛을 간직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공동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개방된 사고가 우리의 사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죄하기 전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을 살펴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일상에서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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